2020년 9월 2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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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의 얼이 깃든 곳 황희 선생 유적지
- 방촌 황희선생과 파주

반구정(伴鷗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은 황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의 유림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 뒤 이 일대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정자를 복원해 오다가 1967년 개축하고,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양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새롭게 개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구정 입구
반구정 내 정자
반구정 현판

태조 이성계는 고려유신들과 황희를 온갖 방법으로 회유했지만 그들은 외부와 완전히 연락을 끊고 두문동에 은거하며 아무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한편 황희의 능력을 아까워한 두문동의 선비들은 황희를 설득하여 결국 태조의 간청에 응하게 되며, 나이 서른에 성균관의 학관과 세자 스승인 정 7품의 ’세자우정자(세자의 선생)‘를 겸직하고 세자를 가르치고 보필했다.

출사와 관련돼 두문동에서 황희를 떠나보내며 아쉬움을 표현한 정건천의 시조이다.

그대는 청운에 올라 떠나고   (君登靑雲去) 

나는 청산을  향해 돌아가네  (子望靑山歸) 

청운과 청산이 이에 갈라서니 (雲山從此別)

눈물이 비단옷을 적시는구려.  (淚濕碧羅衣)

 

황희정승 영정
황희정승 동상

 

조선시대 최장수 ‘청백리 황희정승’

 

황희 정승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청백리의 표상이다. 조선이 개국되던 태조 원년에 30세의 나이로 관직에 나아가 87세에 영의정부사에서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태조 정종 태종 및 세종 등 4데에 걸쳐 관직에 봉직하였다. 특히 황희 정승은 세종조에 이르러 23년간 정부의 수반으로 집권하여 당시 자신의 특출한 정치사상을 일관되게 주창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세종대왕과 함께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데에 충추적 역할을 하였다. 황희 정승의 사상은 법치사상, 민본사상 그리고 평등사상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찍이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며 백성의 편안한 삶과 안위를 국가가 책임져야 하며 백성이 편안하여 국가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관(벼슬아치)은 민폐를 끼쳐서도 안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하고 조세 정책 등을 공정하게 하여 백성의 삶이 윤택해 질 때 진정한 선정이라고 설파하였다.

진정으로 민본사상은 자연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언론자유와 여론존중을 들 수 있으며,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충효사상을 들 수 있다.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전반 군주전제 체제와 왕도정치 사상이 뿌리 깊게 깔려 있던 시대에 황희 정승의 정치사상은 획기적으로 진보된 선구적 정치사상이라 할 수 있으며 오직 백성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그의 숭고한 철학에서 필연적으로 정립된 정치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황희정승 저택전경
황희정승 저택

평등사상으로는 선비, 농부, 장인, 상인 등 ‘사농공상’의 계층별 신분이 확고했던 15세기 초반에 황희정승은 장영실 같은 노비출신이라도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등용을 하였다. 어린 종에게 출세의 기회를 남몰래 주었으며, 관청 여종에게 산월과 산후 100일간의 출산휴가를 주는 것을 제도화 하였다.

고위관료들의 부패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하여 황희정승은 남달리 언론 창달에 힘을 기울였으며, 나라의 주인을 백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백성이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언론자유’이고, 백성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여론존중’이라고 말하였다.

황희정승 영당 입구
황희정승 영당

방촌영당

 

방촌영당(?村影堂. 경기도 기념물 제29호)은 방촌 황희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과 유림들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선생의 호를 따라 방촌영당이라고 한다. 영당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다. 건물주위로는 방형의 담장을 둘렀으며 정면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매년 선생의 탄신일인 음력 2월10일 후손과 지역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방촌영당
영정을 모신 곳

황희선생 묘

황희 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제 34호)는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 88번길에 위치하며 황희 선생유적지로부터 약 8km떨어져 있다.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고, 봉분 규모가 매우 크다. 봉분의 구조는 다른 묘의 형태와 달리 전면을 ㄷ자 모양의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해 호석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향로석이 있으며 그 앞에 네 개의 화창이 투각된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다.

방촌 황희정승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예장으로 모실 때 문종이 군신지의에 정례로 직접 금승리로 내려와 조문한 자리에서 묘 앞에 산봉을 가리켜 정표로 어봉으로 부르도록 중신과 유림들에게 하명하여 이름한 산하 이름이 문지리(文智里)이다. 문종이 방촌선생 예장 당시 ‘문덕지(文. 德, 智)’를 넓힐 것을 간곡한 교시에 힘입어 문과 지를 보배같이 여겨 실천하고자 하여 이름한 것이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문종은 노 정승을 기리는 뜻에서 교하현 작은 마을에 ‘문발“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후 560여년이 넘도록 주민들은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취재 : 이정민 시민기자

작성일 : 2018-4-24 조회수 :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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