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5일 (화)
칼럼
사할린을 가다 ③
한 맺힌 유해 18위 봉환

8월 27일 오후 7시에는 러시아 영사를 비롯하여 유족과 사할린지역 단체장과 한인회장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총괄인 진영만 사무국장 주관으로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는 뚜리스트 호텔 만찬장에서 간담회가 있었다.



떠나기 전날 간담회


이 자리에서 이번 행사에 공로가 있는 사할린 주 이산가족협회 박경춘 부회장 외 5명이 표창장을 받고 감사패는 사할린 주 러시아외무성 브라지미르 노소프 대표 등 4명은 모두 러시아인으로서 이번 업무에 관계자들에게 수여 되었다.



감사패 증정


국무총리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장 박인환. 이하 위원회라 칭함)에서 2007년부터 2013년까지 확인된 사할린 지역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 1만 여기를 확인했다. 그중에 이번에 2차로 18위를 발굴 봉환하게 된 것이다. 8월 26, 27일 이틀에 걸쳐서 발굴된 유해는 사할린 장의사(무프 장례서비스 회사)에 의뢰해 화장터로 보내어 화장을 마친 뒤 28일에 인수하게 된다.

돌아오는 날 8월 28일 오전 11시부터는 유즈노사할린스크 한인회관에서 위원회 주최로 화장된 유해를 모셔놓고 유골봉환 추도 및 환송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한국 총영사, 사할린주지사, 러시아 정발레리의원, 일본공사, 유즈노사할린스크 시장, 한인협회장, 사할린지역 관련 단체장, 그리고 그 밖에 관계자와 유족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유족의 분향


국민의례에 이어 박인환 위원장의 추도사와 유족대표 엄상헌씨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추모사를 하는 동안에 객석에는 울음바다를 이뤘다. 유족 중에 한사람은 일본공사를 향하여 푸념을 하며 통곡한다. 유족과 내빈들이 헌화하고, 그동안 묘소를 돌보던 유가족 친지들은 헌화하면서 슬픔에 겨워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한다. 엄숙한 분위기로 헌화의 순서가 끝나고 진행자는  유골함을 각각 유가족 가슴에 안겨주고 유족은 정중하게 받아 모시고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으로 떠난다.

오후 1시쯤 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가 오후 4시가 조금 지나서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힘들고 지친 몸을 끌고 인천공항을 도착하니 오후 8시가 다되었고 많은 가족들이 마중을 나왔다. 또한 TV, 신문 기타 인터넷 방송 등 많은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다. 취재진들의 인터뷰가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에 18위의 유골함은 영구차로 천안 국립망향의 동산 귀정각으로 모시고 일행은 재향군인 상조회 버스로 천안 온천장호텔에 투숙하니 오후 11시가 넘었다.



슬픔의유족들, 인천공항


이튿날(8/29)은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사할린 강제동원 한인 희생자 유골 봉환 추도 및 안치식이 오후 2시에 있었다. 유족과 그 가족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찰악대의 주악을 시작으로 무용단에 의해 살풀이춤 공연이 있었다.



살풀이춤


이어서 국민의례와 내빈소개 및 경과보고를 하고 추도사와 추모사가 끝나면서 헌화와 분향을 마친 유골은 유족에 의해서 봉안당으로 이운되었다.


 
봉안당 앞 유가족들


망향의 동산


2부 행사로는 합동 위령제가 불교의식으로 장엄하게 펼쳐졌다. 아직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땅에 묻혀있는 나머지 일만 여기의 유해를 하루빨리 모셔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합동위령제


사할린은 러시아 연해주 동쪽,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위치한 러시아연방으로 일본에서는 가라후토(樺太)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19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8만7100km²로 남한보다 조금 작다.

1799년 일본의 에도 막부가 사할린 섬 남부의 통치를 시작했으나 1853년 러시아 제국이 영유를 선언한다. 이후 러·일 양국의 ‘협동 관할지’를 거쳐 1875년에는 러시아 영토가 됐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섬 남부가 일본의 통치 아래 들어가고 1918년에는 일본군이 사할린 섬 북부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이후 모집, 관 알선, 징용 등의 이름으로 한인들을 사할린에 강제로 끌고 갔으며 그 수는 1941년 5만, 1942년 11만, 1943년에는 12만 명에 이르렀다. 탄광, 벌목장 등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며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한인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광복이 아니라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패배에 따라 사할린을 비롯한 4개 섬이 러시아로 귀속되자 일본은 27만 명의 자국민만 본국으로 귀환시켰고, 한인들은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할린에 방치했다.

귀국선을 기다리며 광복 후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소련과는 국교조차 없었던 조국 대한민국도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일본인 처를 둔 일부가 일본으로 귀환했고, 더러는 러시아 대륙으로 이주하거나 북한행을 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돌아오는 분들은 무국적자로서 외롭게 고생을 하다가 한을 가슴에 품고 생을 마감한 원혼들이다.

취 재: 정태섭 싱싱뉴스 시민기자

작성일 : 2014-11-17 조회수 : 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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