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일 (수)
역사와 전통
율곡이 퇴계를 찾아간 이유?
23세 “거친물결”이었던 율곡이 퇴계를 찾아간곳은 도산서원이 아닌 계상서당이었다.

자운서원을 찾는 관람객이나 외국인에게 오천원 지폐를 펴보이며 얘기를 시작하면 흥미와 교감이 빨리 이루어진다. 거기에 같이 이야기의 반열에 올리는 사람이 천원권에 나오는 퇴계선생이다. 그러면 어린이들도 재미있어하고 소위 감을 빨리 잡는다.

오천원의 뒷면에는 오죽헌이 나와있고, 천원권에는 동양화 한폭이 실려있다. 그 동양화가 바로 겸재의 [계상정거도]이다. 계상정거도가 무엇일까 - 그리고 그것이 파주와 율곡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네티즌과 방송에서 논란이 일었다는, 그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율곡은 16세에 어머니를 자운산자락에 모시고 시묘후 금강산에 들어가있다 나와 장가를 든다. 그러나 곡산노씨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성주 처갓집에서 겨울을 나고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던 율곡은 절에 들어갔던 일이 족쇄처럼 따라다닌다. 그래서였던지 스스로를 ‘거친물결’이라고 표현하던 23살의 율곡은 예안지방으로 퇴계를 찾아간다. 그때 퇴계는 풍기군수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마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관직생활을 마지막에서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탄생하게 하는 큰 일을 하고 돌아온 고향마을 온계리, 오늘날의 안동 토계리이다. 그 고향 개울가에 지어진 작은 초가서당으로 율곡이 찾아간 것이다. 낙동강변을 따라 산으로

산으로 들어가며 율곡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기서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영남학과 기호학의 두 석학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율곡이 퇴계를 찾아 간곳이 바로 계상서당, 그곳에서의 두사람의 만남은 오늘날까지도 신비스럽게 전해오는데, 율곡은 거기서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찾게 된다. 그때 퇴계는 학문이 거의 완숙의 경지에 이른 58세의 나이였다. 때는 이른봄 유난히 이른 봄비가 많이내려 개울물이 엄청 불어났고 매화가 멍울을 터뜨릴 즈음이였다고 한다. 거기서 이틀 밤낮을 묶게되는데 그 이유가 꼭 비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꼭 알고 싶고 묻고 싶은것이 있었을 것이다.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그무엇- 율곡은 그때 퇴계를 만난 심정을 나중에 퇴계가 세상을 떴을때 “이제 물을곳을 잃었으니 어디다 물음을 구할까”라고 했다는 것으로 그 만남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계상서당 - 율곡이 퇴계를 찾아갔던 곳. 원래는 초가지붕의 두칸 방이었다고 한다♠


율곡이 강릉 외가로 떠나는 날 아침, 온계리는 짖눈깨비가 눈으로 바뀌어 온천지가 하얀 매화꽃이 핀 것 같았다고 한다. 율곡이 떠날때는 날이 개이고 봄볕이 환하게 넘쳐 났다고도 한다. 강변을 끼고 들어올 때와 나올 때의 그 세상의 빛은 분명 달라져있었을 것이다. 퇴계는 떠나는 율곡에게 물건하나를 건넨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젊은 선비에게 해주고 싶은 말, 그 말이 바로 거경궁리(居敬窮理)였다. 거경궁리- 바로 주자의 학문방법인 정신통일의 수단이며 성리학의 기본이념, 즉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며 경에 머무른다는 뜻. 이는 올라가면 공자에게로 이어지기도하며 [대학]에 나오는 말로서, 율곡이 그내용을 몰랐을리야 있겠는가마는, 큰 스승이 그 시점의 율곡에게 해 준 말이었으니 그 받아들임의 크기야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율곡이 다녀오고 2년후 그 계상누옥은 없어지게 된다. 산이 막혀 답답하여 후학을 가르치기에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즉 호연지기의 마음을 키우기에 적절치 않아 오늘날 도산서원의 전신인 도산서당으로 옮겨 앉는다. 강릉외가로 가 있는 율곡에세 편지 하나가 도착한다. 퇴계가 보내온 편지였다. 율곡은 공부에 전념하였고, 그해 치뤄진 성균관 별시에서 ‘천도책’이란 내용으로 장원급제를 한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최고급 논술시험 이랄 수 있겠는데 중국에서 사신들이 와도 그 내용을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두사람은 10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는다. 율곡을 만난 인상을 제자였던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는 이렇게 말했다.“사람이 밝고 쾌활하며, 본 것이 많고 자못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생이 두려울만하다는 성현들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다”고- 이 때 쓴 말이 바로 ‘後生可畏’- 논어의 자한편에 나오는 얘기로 공자가 안회를 두고 한 말이다.

그때 율곡이 퇴계를 뵙고 드린 헌시가 전해오는데,

시냇물은 수사에서 나뉜 가닥이고/ 산봉우리는 무이산처럼 빼어났습니다
살아가는 살림은 천여권의 경전이고/ 거처하는 방편은 두어칸의 집 뿐입니다
뵙고 싶었던 회포를 푸니 구름속의 달을 보듯 머리 개이고
웃음 섞인 말씀을 듣고나니, 거친 물결을 멈추게 합니다.

율곡이 계상서당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퇴계는 율곡을 위해 두 수의 시를 짓는다. 첫시는 만남의 시이고 두 번째는 전별시였다. 두시의 제목은 [빗속에 3일동안 계상을 방문한 율곡에게]인데 거기서 율곡을 뛰어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젊은 나이 큰 명성에 그대는 서울에 살고/ 늙고 병많은 이몸은 촌에 사니
어찌 알았으랴. 이날 그대 찾아올 줄/ 지난날의 그윽한 회포를 다정히 애기해보세.

그로부터 얼마의 세월이 흐른후 우리 산수화의 천재화가 겸재가 세상에 나타났다. 겸재의 산수화는우리의 강산을 직접보고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법의 뿌리를 내리게 된다. 겸재는 도산을 방문하고 그 감동을 그림을 그린다. 그림의 제목이 [계상정거도], 이 그림은 겸재가 71세 때 퇴계 이황이 쓰던 서당 주변의 산수를 담은 풍경인데, 겸재는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태어난 인물로 그때는 이미 도산서원이 자리가 잡혀있던 때이므로 겸재는 계상서당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왜 그림의 제목을 그것으로 하였을까. 아마도 그 누옥에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던 그 아름다운 의미를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전설속의 심오한 이야기처럼 부각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천원권의 새로운 지폐가 선보였다. 앞면의 인물은 퇴계요, 뒷면에는 그 [계상정거도]가 올라있다. 그런데 천원권의 그림이 도산서원이냐 계상서당이냐를 놓고 논란이 되기도 한다. 그림은 아무리 보아도 도산서원 풍경과 닮아있다. 그래서 그 자체가 위작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폐에 진경산수화가 인쇄된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율곡선생님이 찾아가 거친바람을 잠재우고 학업에 전념해 파주가 가히 기호학의 산실이 되게한 결의의 자리가 바로 “계상서당”이었다는 것을, 그 만남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글로 써 보았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만남을 가지면서 살아간다. 오늘 내가 만나는 만남이 내 인생에 어떤 계기로 작용할까. 그러나 그것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진정으로 들여다볼줄 알고 인정할줄도 알때, 다가오는 방향과 크기는 달라질 것이다. 어떤 만남을 만들며 살아갈 것인가. 나는 어떤 만남을 가지며 살았는가. 또 한번의 묵은 해인 2008년 무자년을 보내면서 아주 오래된 400여년이 넘은 만남이었지만 하나의 아름다운 만남을 만나 보았다.


글 : 성희모 momone9991@hanmail.net
     싱싱뉴스 시민리포터
작성일 : 2008-12-26 조회수 : 7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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