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8일 (일)
역사와 전통
윤관장군 유적지에서 기(氣)를 받다!

□ 윤관(尹瓘) 그는 누구인가?

윤관(尹瓘)

윤관은 파평 윤씨로 고려 개국공신인 윤신달(尹莘達, 893∼973)의 후손이다. 고조인 윤신달은 태조 왕건을 보좌한 공으로 삼한공신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며, 부친은 윤집형(尹執衡)이다. 고려시대 중기인 1107년, 2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 9성 설치와 함께 고려 영토를 확장한 고려시대 문관이다. 그는 고려 국경에 침입한 여진족을 강력한 군대로 대처하여 두만강 이북 지역의 영토를 개척하는 대업을 이룩하였다. 윤관만큼 고려사 열전에 비중 있게 실린 인물이 있을까. 윤관이 이룩한 동북 9성의 설치는 그가 살았던 시기보다 조선 초에 와서 더 조명 받았다. 특히 세종(世宗, 1397~1450)대에는 여진 정벌과 함께 4군 6진이 설치되었는데, 이 시기에 윤관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동북 9성이 재조명되었다.

□ 파평 윤씨의 발상지, 용연(龍淵)

윤관장군이 잠들어있는 광탄면 분수리에 위치한 묘역을 찾기 전에 윤관장군의 조상과 관련된 유적지, 용연(龍淵)이 파주에 있는 것을 알고 먼저 그곳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용연은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이 태어난 곳으로 파평 윤씨의 발상지이며,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다.

용연은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이 태어난 곳으로 파평 윤씨의 발상지이며, 성지(聖地)
윤씨 연못

태고부터 지하수가 솟아나는 천연의 연못으로서 '윤씨 연못' 으로도 불리는 이곳에는 전설이 있는데, 신라 진성왕 7년(893년) 음력 8월 15일 운무가 자욱한 용연에 옥함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근처에 사는 할머니가 거두어 열어보니 옥동자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오색찬란한 깃털에 쌓여 있었으며, 양 어깨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점이 있고 좌, 우 양 겨드랑이에는 81개의 비늘이 있으며 발바닥에는 북두칠성 형상인 7개의 흑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옥동자가 윤씨 성을 갖게 된 연유는 옥함에 윤(尹)자가 새겨있었다는 설과 손바닥에 윤이라는 글자가 뚜렷했다는 설 등이 있다. 이후 할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받고 성장했는데 타고난 인품과 탁월한 재능으로 학문과 무예를 익혀 고려건국과 삼한통합의 공을 세웠다고 한다.

말년에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다스리는 경주대도독으로 부임하여 향년 81세(973년)에 임지에서 서거하였고, 지금의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아래 묻혔다. 이 연못에는 여름철 희귀식물인 노란 '개연꽃'이 자생하고 있으며, 인근에 윤씨 관련 유적지가 많은데 파평산 정상에는 시조 윤신달이 말을 타고 훈련하던 치마대가 있다.

○ 소재지: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385-1
○ 찾아가는 방법: 문산에서 적성으로 가는 37번 도로의 두포삼거리에서 파평방면으로 빠져나와 파평중학교와 파평면사무소를 지나고 파평삼거리에서 적성방향으로 진행하다 우측에 있는 안내표지판을 보고 진입하면 된다.

□ 윤관의 전설이 상서대에 깃들다

용연을 둘러보고 한적한 찻길을 시원스레 달려 법원읍 웅담리에 위치한 오늘의 주인공, 윤관 장군의 전설이 깃든 상서대에 도착했다. 상서대(尙書臺)는 윤관 장군이 상서(尙書)란 벼슬에 있을 때 여가를 틈타 시문과 휴양을 즐기던 별장지로 전해온다.

그 후에 후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닦던 유서가 깊은 별저의 유허지로 실전(失傳, 산소를 잃음)된 파평 윤씨 후손들의 비단을 모신 추원단(追遠壇)이 위치하고 있다.

상서대는 별다른 건축물 없이 단지 장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사주문(四柱門)을 세워 출입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내부 중앙에 ‘상서대(尙書臺)’라 쓰여 진 비와 그 앞으로 묘소가 실전된 파평 윤씨 12위의 추원단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 상서대 내부에는 윤관이 직접 심었다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병화로 타 죽었으나 그 자리에서 다시 새싹이 자라났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 노거수 두 그루는 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

상서대 전경

[상서대 전경]

상서대 내부 전경

[상서대 내부 전경]

상서대가 위치한 웅담리(熊潭里)는 사연 많은 지명유래가 지금껏 전해온다. 윤관 장군의 시중을 들던 웅단(熊丹)이 상서대 옆으로 흐르는 개울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순절했다고 한다.

훗날 그 연못에 웅단이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지금도 이 마을을 ‘웅담(熊潭)’ 또는 곰소, 곰시라고 부르고 있다. 웅단이 몸을 던진 바위 위에 낙화암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2011년 7월 집중호우로 낙화암비가 유실되어 파평 윤씨 문중에서 다시 상서대 담 벽 옆에 비석을 세웠다.

상서대 옆을 흐르는 개울

[상서대 옆을 흐르는 개울]

낙화암 비

[낙화암비]

○ 소재지: 파주시 법원읍 웅담리 329-9
○ 찾아가는 방법: 법원읍에서 367번 도로를 타고 적성으로 길을 잡는다. 쇠꼴마을 입구를 지나며 금곡교에서 우측으로 빠져 술이홀로를 타고 웅담리로 접어들어 `상서대` 표지판이 보이면 우회전하여 웅담교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향하면 바로 나온다.

□ 조선의 명당 윤관장군 묘, 이곳에서 기를 받다!

파평의 용연과 법원읍의 상서대를 거쳐 파주의 자랑이자 용맹스러운 장수, 이제는 편안하게 잠들어 계신 이곳 윤관장군의 묘소를 찾았다. 윤관장군은 ‘문무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 6년(1111)에 돌아가시자 이곳에 안장하였는데 위패를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셨고, 조정에서는 고려 태조와 충의 공신을 모신 숭의전에 함께 배향하였다’라고 기록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1988년에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며 성역화 되어 왕릉 못지않은 커다란 규모를 갖추고 있다. 묘역에는 묘·영당(影堂)·교자총(較子塚)·신도비(神道碑)·재실(齋室) 등이 있다. 묘는 원형봉분이며 묘비·상돌·문인석·무인석·돌말[石馬]·돌호랑이[石虎]·장명등(長明燈)이 갖추어졌다. 묘비문은 “고려 수태보문하시중 영평백문숙 윤공휘지묘(高麗守太保門下侍中鈴平伯文肅尹公諱之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1988년 묘역정비 사업을 하여 영당·신도비·재실을 개축하였으며, 영당은 여충사(麗忠祠)라 하고 그 안에 윤관의 영정을 모셨다.

윤관 장군 묘

윤관 장군 묘는 조선의 8대 명당자리로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데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의 글을 인용해보면 “장군의 묘역입구에서 바라보면 뒤의 현무봉이 마치 장군이 정좌한 것처럼 위엄 있어 보인다. 좌우에는 좌천을 우태을로 부르는 봉우리가 현무봉을 호위하듯 서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큰 기운이 느껴진다. 묘역에서 용맥을 살피기 위해 뒷산을 오르면 용맥(산능선)이 지현자(之玄字)으로 계속 굴곡하면서 변화가 활발하다. 용맥의 변화하는 마디를 절이라고 하는데, 묘에서 현무봉 정상까지 36절룡이라고 한다. 1절을 1대로 보는데 1대가 25~30년이니, ‘파평윤씨 천년발복지지’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이곳의 태조산은 한남정맥 호명산과 도봉산 사이에 있는 꾀꼬리봉이다. 앵무봉(621.8m)과 계명산(560m)은 중조산이고, 박달산(363m)은 소조산이다. 박달산에서 현무봉까지 이어진 산맥은 마치 기치창검을 높이 들고 백만대군이 행진하는 모습이다. 현무봉에서 묘지까지 내려오는 맥을 입수룡이라고 한다. 입수룡의 끝자락에 기를 모으기 위한 방법에는 결인속기법, 좌우선룡법, 태식잉육법 등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중 윤관 장군 묘역은 결인속기법에 해당된다. 묘 바로 뒤가 잘록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잘록한 부분을 결인이라고 하는데 목을 묶었다는 뜻이다. 목을 묶으면 그 아래에 기가 모이게 되는데 이를 속기라고 한다. 역도 선수들이 벨트로 허리를 잘록하게 묶으면 상체로 기운이 모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묘역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잘 감싸고 있으며, 정면에는 북처럼 생긴 안산이 둥그렇게 있다. 그 뒤로는 초승달처럼 산이 뒤를 받쳐주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귀인봉, 노적봉, 천마봉, 일자문성 등 귀하게 생긴 산들이 즐비하다. 이곳의 형국은 윤관 장군의 묘답게 장군대좌형으로 보이는데, 형국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현무봉은 영락없는 장군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좌우에는 호위 무사가 있고, 안산은 장군이 진퇴를 지휘하는 북, 천마봉은 말, 노적봉은 군량미, 일자문성은 막사에 비유할 수 있다. 윤관 장군의 행장과 묘지의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 그래서 땅에는 임자가 있는가 보다.”

무슨 연유에서 인지 장군의 묘소는 몇 백년간 실전되었다가 조선중기에 후손들의 손에 어렵게 되찾고 그 후 400여년 가까이 청송심씨와의 산송분쟁(무덤싸움)로 몸살을 앓다가 최근에서야 원만하게 해결되어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파주의 수호신 같은 장군의 기운이 후대에 이르러 남북의 화해모드로 전환하는 이때, 파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열어주시는 것은 아닌지?

아무튼 윤관장군의 유적지를 뒤따르며 받았던 기가 계속 이어져 큰 기적을 이루길 소망해본다.

○ 소재지: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

○ 찾아가는 방법: 광탄면에서 78번 도로를 타고 용미리. 고양시 고양동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광탄면사무소를 지나며 좌측으로 안내 표지판이 보이면 진입한다.

취재 : 김명익 시민기자

작성일 : 2018-7-24 조회수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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