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4일 (목)
역사와 전통
조선의 천재 율곡 이이가 잠들어 있는
- 파주이이 유적을 찾아

‘율곡 이이’하면 강릉 오죽헌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강릉은 외가이다. 본가는 법원읍 율곡리로 어린시절 한 때와 벼슬을 물러난 후 이곳에서 지냈다. 율곡이이는 그가 살던 마을 이름, ‘율곡리’의 이름을 따 본인의 호로 삼았다. 어머니 신사임당과 아버지, 부인과 함께 가족묘가 파주에 모셔 있다. 2015년에는 서울 종로 사직단에 세워진 율곡이이 선생과 신사임당의 동상이 파주이이유적으로 이전했다. 이와 같이 파주 곳곳에는 율곡이이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우선, 율곡이이와 관련된 파주의 유적지로 먼저 법원읍에 위치한 파주이이유적(국가사적 525호)부터 살펴보자. 다음엔 율곡선생의 쉼터, 화석정과 파주지역 유생들의 공부방 파산서원, 파주삼현(율곡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의 유적지까지 율곡이이선생과 관련된 파주 유적지를 시리즈로 알아보자. 

 

파주이이유적

 

 

파주 법원읍에는 파주이이유적이 있다. 이곳에는 조선중기 대학자이자 경세가였던 율곡 이이 선생을 기리는 자운서원, 자운서원 묘정비, 율곡 이이 신도비, 율곡기념관, 율곡전통문화학교, 어머니 신사임당을 비롯한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율곡 이이 가족묘 등이 있다.

 

율곡 이이(1536~1584)는 오죽헌에서 태어나 6세까지 그곳에서 성장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13세인 명종 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 3년상을 마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1년을 보내기도 했다.

『율곡 이이(한영우 저)』 평전에 따르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심리적 갈등을 겪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방황과 고뇌를 슬기롭게 극복해 진정한 위인이 됐다"고 평가한다.

 

율곡 이이는 스물 살 때 자기 수양을 위해 『자경문(自警文)』을 짓는다. “뜻은 크게 갖되 말은 적게 하겠다”라 적고 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관리가 큰 사람으로 만드는데 바탕이 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명종 때 ‘구도장원공’이라고 칭송받았다. 이는 문과 과거시험은 9단계를 거치는데 모든 시험을 장원으로 합격한데서 붙여진 호칭이다. 각 시험에 9번이나 장원을 한 사람은 조선 500년 동안 율곡 이이 뿐이다.

벼슬은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이조판서, 이조좌랑, 청주목사, 직제학, 동부승지, 대사간 , 대제학 등을 지냈다. 선조 1년에는 천추사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동서분당 화해를 위해 노력했고, 10만 군대 양성 및 대동법과 사창 실시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부교리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저서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동호문답』, 『경연일기』 등이 있다

율곡이이 유적지
율곡이이 묘역

 

『격몽요결』을 살펴보면 칼날로 뿌리를 자르듯 낡은 습관을 버리라고 일갈한다. 버려야 할 여덟 가지 낡은 습관은 1) 놀 생각만 하는 습관 2) 하루를 허비하는 습관 3)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습관 4) 헛된 말과 글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는 습관 5) 풍류를 즐긴다며 인생을 허비하는 습관 6) 돈만 가지고 경쟁하는 습관 7) 남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 8) 자신의 처지를 절제하지 못하고 재물과 여색을 탐하는 것이다.

 

자운서원은 이와 같은 업적을 남긴 율곡 이이를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에 의해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졌다. 효종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584년 (선조 17년) 49세에 세상을 뜨게 되어 법원읍 자운산(紫雲山)자락 가족묘역에 묻혔다. 이곳 가족묘역의 특징은 자식인 이이 율곡선생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묘보다 위에 위치하고, 그의 부인의 묘가 율곡의 묘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자식이 큰 업적을 남기면 그렇게 했다고 한다. 또 그의 부인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꾸중하다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뜻을 기려 남편 이이보다 위쪽에 묘를 안장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과거시험 9단계를 모두 장원 합격했던 가히 천재라 할 수 있었던 율곡 이이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특별했다. 16세기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세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번역한 ‘삼현수간’(장주식 저) 의하면 율곡은 나라를 위한 충성 중에 첫째는 사사로운 욕심을 멀리 하는 것이라 했다.

율곡이이가 살던 곳
율곡 이이 유적지 가는 길

 

율곡 이이는 구봉 송익필과 봉록으로 받은 쌀과 콩을 나눠먹고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가지고 간 포대는 바로 보내라며 따뜻한 정을 나눴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구봉에게 ‘임운천화’라는 글을 보낸다. 운명을 맡기고 자연의 변화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10대 때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기도 했으나 마음을 새로 붙잡아 조선의 대학자, 경세가로 이름을 떨친 율곡 이이는 자연의 변화에 자신을 맡기고 법원읍 자운산 자락에 겸손히 묻혀있다.

 

새해를 맞아 시민 각자 새로운 다짐으로 시작하고 있으리라 본다. 율곡 이이의 “머뭇거리며 날을 보내면, 해를 다하여 세상을 마칠 때까지 어찌 성취할 수 있겠는가?(격몽요결)"라는 말을 되새기고 다짐을 실천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파주이이유적
전화 : 031-958-1749
주소 : 법원읍 자운서원로 204

취재 : 최 순 자 시민기자

작성일 : 2018-1-16 조회수 :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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