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일 (수)
역사와 전통
소년 이율곡, 끊임없는 자아통제와 현실인식으로 문제해결
파주의 인물 탐구 - 율곡 이이 선생

영원한 파주인으로 남은 율곡 선생
율곡 선생은 1536년(중종 31)12월 26일 외가인 강릉 북평촌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났다
성(姓)은 이씨(李氏), 이름은 이(珥), 자(字)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서, 아버지는 원수(元秀),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공은 수운판관,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어머니 사임당(師任堂)은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로 이름났으며 기묘명현 평산 신명화와 용인이씨 사이의 둘째 따님이다.


 

♠ 율곡 영정 ♠

선생은 7남매 중 다섯째(위로 형 2, 누나 2)로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6세 때 서울 수진방(壽鎭坊:지금의 청진동)의 아버지 본가로 올라와 10여년을 살다가 16세 되던 해 봄에 다시 삼청동(三淸洞)으로 이사하여 생활하게 된다. 22세 되던 해 9월 다섯 살이 아래인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따님과 결혼했다. 그런데 선생은 불행히도 정처인 노씨(盧氏) 부인에게서는 손이 없었고, 두 측실(側室)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경림(景臨)으로 선생의 나이 39세 때 낳았고, 둘째 아들은 경정(景鼎)으로 44세 때 낳았다.

율곡 선생에게 있어서 주로 생활의 근거지가 된 곳은 외가가 있는 강릉 오죽헌, 처가가 있는 해주 석담, 그리고 친가가 있는 파주 율곡리였다. 특히 파주 율곡리는 선생의 선대가 대대로 살아온 본향(本鄕)이며 선생의 호 율곡(栗谷-밤골)이 유래된 마을이기도 하다.

천재형 학자
율곡 선생은 천재형의 학자이자 경세가로서 이미 3세에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 같게?" 하고 묻자, 어린 율곡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잠시 쳐다보더니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어요(石榴皮裏碎紅珠)" 라고 옛 시 귀절을 읊어 대답하였다. 또, 일곱 살 때는 이웃에 사는 진복창이라는 인물의 사람됨이 교활하고 간악해 보여 붓을 들어 글을 지었는데, 그 능숙하고 의표를 찌르는 표현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덟살 때는 고향 파주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가을 풍경의 정취를 아름다운 시로 읊었으며, 열살 때는 강릉 경포대를 들러 장문의 경포대부를 지었는데 여기에는 노장사상 등에 대한 그의 폭넓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하고, 21세에는 한성시에 급제하였으며, 23세에는 별시에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가기까지 무려 아홉번이나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다.

  

♠ 자운서원에 자리한 율곡이이 선생묘(사진 왼쪽)와 자운서원(사진 오른쪽) ♠


따뜻한 인간애와 지극한 효성
율곡 선생은 감정이 풍부한 소년이었다. 대개 남다른 재주를 지녔거나 공부에 뛰어난 어린이는 우쭐대거나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수도 있지만 율곡은 그렇지 않았다. 동네 아이 누구와도 잘 어울렸고 항상 다정하게 인정을 나눴다.
율곡이 5세 되던 해, 어느 날 큰 비가 와서 앞 냇물에 홍수가 졌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내를 건너다 넘어져 위태롭게 되자 그것을 바라보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웃어대는데 율곡은 기둥을 부둥켜 안고 서서 애를 태우다가 그 사람이 위태로움을 모면하게 되자 그제서야 안심하는 기색을 띠었다.

율곡 선생은 효심이 지극해 어릴 적부터 이웃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 다섯 살 때 어느 날 어머니 사임당이 몹시 아파서 온 집안이 걱정을 하였는데, 집안 사람들 몰래 외조부님 사당 앞에 가 엎드려 어머님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또, 열 한 살 때는 아버지 이원수 공이 병환으로 위독하자 율곡은 어린 나이로 자신의 팔을 찔러 피를 내서 아버지에게 약으로 드리기도 했다. 옛 글에서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을 때는 피를 마시면 소생한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사당으로 달려가 엎드려 울면서 조상께 기도를 드렸다. 어린 율곡의 이런 정성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아버지의 병환이 곧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16세에 어머니 사임당을 여의게 되자, 무덤옆에 묘막을 짓고 3년동안을 아침 저녁으로 밥을 지어 올리고 묘소를 돌보았으며, 26세에는 아버지 이원수 공마저 돌아가시자 파주 어머니 묘에 합장한 후 형제가 함께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방황과 홀로서기
율곡 선생은 나이 열 셋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문장이 날로 성취되어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그런 명성과 기대에 못지 않게 그의 학문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민과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연보에는 어린 나이에 성공의 첫 관문을 통과하고도 오히려 '학문에 전념하고 과거는 좋게 여기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자신을 알아준 문장가 송인(宋寅)에게 보낸 다음 글은 그의 이러한 갈등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 제가 성현의 글을 읽은 뒤로 대강 향방을 알고서 성리(性理)의 근원에 마음을 가라앉혀 탐색하고자 했으나 뜻이 약하고 재주도 둔한 데다 세상 일이 저해함도 많았습니다. 더구나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고 생활은 궁핍하여 사람의 뜻을 고상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과거공부에 종사한지가 몇 해가 되었습니다. 비록 학문에 전념하더라도 오히려 짐이 무거워 감당하기 어렵고 길이 멀어서 도달하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하물며 과거공부까지 하여 두 가지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러한데도 또 문장의 기예에 종사하면 이것 저것 모두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 한가지 방심(放心)도 거두어들이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까지 생각하겠습니까?“                            
                                                                                                                          「율곡전서 3, 여송이암」

학문에 뜻을 두고도 방법을 몰라 헤매는 율곡에게 세상은 과거를 목표로 문장을 닦아 세상에 영합하라는 노숙한 충고뿐 이었다. 그 흐름에 떠밀려 보낸 몇 년이 그에게는 외적 기대와 내적 고뇌가 뒤섞인 우울의 세월이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
그러던 중 조운(漕運)의 일을 맡은 아버지 이원수공을 따라 남도를 돌아오던 그에게 어머니 사임당의 부음 소식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마포에 배를 대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어머니 사임당을 임종도 못하고 떠나 보낸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율곡 선생의 정신에 끼친 영향은 당대의 문장으로 떨치던 동년배 최립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다.

“내가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학문하는 방법을 몰라서 노유선생에게 찾아가서 학문을 구하였습니다. 노숙한 선비들이 권면하는 것은 과거하는 공부에 불과하고 구차하게 세상에 부합되는 것을 힘쓸 뿐 이었습니다. 어려서 지식이 없어 드디어 그 일에 향해 가서 세속 일에 골몰하고 문장 격식이나 익히기를 5∼6년 동안 하였습니다. 성리에 관한 학문은 다시 강구하는 바가 없고 과거 공부도 익숙하지도 못했습니다. 마침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제의 몸으로 책을 쥐지도 못하고 다만 옛 사람들의 글로 해학에 가까운 것을 취해서 수시로 열람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고, 그 문장에도 전연 접하지 않은 지 3년이 지났습니다. 하루아침에 분발해서 가슴 속을 돌이켜보니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에 가만히 탄식하기를, ‘사람이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배우고 배우지 않은 데 달려 있고,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은 행하고 행하지 않은데 달려 있다.’ 내가 본래 거친 자질로 또 학행의 자품도 없으며 지난날의 공부는 과거에만 골몰했을 뿐이다. 과거공부에만 골몰하는 것이 어찌 학행의 부지런함만 같겠는가? 장부가 배우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배운다면 마땅히 옛날 성현들의 성덕한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지 어찌 스스로를 한정하여 물러서겠으며, 마지막 한 삼태기를 덜한 자리에서 공이 허물어지도록 그만두겠는가? 그렇지만 참으로 스승의 가르침이 없으면 스스로 통달하고 스스로 깨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오히려 스스로 좇아 배우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이겠습니까?”
                                                                                                                            「율곡전서 3,여최립지」

율곡은 3년 동안 정성을 다해 어머니의 영혼을 섬겼다. 음식 만드는 일, 그릇 씻는 일도 반드시 직접 자기 손으로 했다. 그리고 틈이 있으면 책을 읽고 사색에 잠겼다. 그는 이 무렵 새삼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회의에 빠졌다. 사람은 왜 태어나며 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깊은 밤 적막한 산골에서 홀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해답을 구해 보았지만 도저히 풀 길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3년이 지나갔다.

  

♠ 자운서원 전경과 자운서원 묘정비 ♠

금강산에 들다

열여덟살이 되던 해 가을 어느날 울적한 심회를 풀길이 없어 발길 닿는 대로 거닐던 율곡은 뚝섬 강건너 봉은사에 들렀다. 승방에 들어 스님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그는 경상 위에 놓여 있는 불교서적을 뒤적이게 되었고 그것은 이전에 볼 때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어쩌면 인생 문제를 풀어 줄 해답이 거기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듬해 열아홉 살 때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의암이라는 법명으로 불교 수행을 하였다. 머리를 깎고 가사 입은 스님이 되었는지 아니면 선비행색으로 절방에서 불교 공부만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율곡이 인생의 삶과 죽음에 관해 번민한 나머지 금강산 절로 들어간 것은 분명하다.
율곡은 불교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진리를 찾지 못한 채 1년 만에 금강산을 나오게 된다.

"내 가슴속에 산수가 있으니 이곳 금강산에 더 머물 필요가 없네"
(胸中有山水, 不必於此留)                                - 등비로봉 -

오히려 유교에 성인이 되는 길이 있고 남을 위해 일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이라는 것도 삶의 연장일 뿐 달리 터득할 기이한 이치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자경문(自警文)을 좌우명으로
금강산에 들어간지 1년만인 20세 되던 해 봄에 선생은 외가인 오죽헌으로 돌아와, 앞으로 걸어나갈 인생의 이정표를 정립하고,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워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을 지어 좌우명으로 삼았다. 바로 이것이 『자경문(自警文)』이다. 자경문은 모두 11조항으로 되어있다.

① 입지(立志)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다.

② 과언(寡言)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 때가 된 뒤에 말을 한다면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다.

③ 정심(定心)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번뇌와 망상을 제거하는 힘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잡념이 분잡하게 일어날 때에 의식적으로 그것을 싫어해서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분잡해지는 것과 같다. 분잡한 생각들이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정신을 수렴하여 집착없이 그것을 살필 일이지 그 생각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오래도록 공부해나가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안정되는 때가 있게 될 것이다.

④ 근독(謹獨)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유념하여 게을리함이 없다면, 일체의 나쁜 생각들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악은 모두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음'에서 생겨난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 있다.

⑤ 독서(讀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그냥 가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   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오똑히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 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 된다.

⑥ 소제욕심(掃除慾心)
재물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과 영화로움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은 비록 그에 대한 생각을 쓸어 없앨 수 있더라도, 만약 일을 처리할 때에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처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또한 이로움을 탐하는 마음이다. 더욱 살펴야 할 일이다.

⑦ 진성(盡誠)
무릇 일이 나에게 이르렀을 때에, 만약 해야 할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그 일을 하고 싫어하거나 게으름피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만약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일체 끊어버려서 내 가슴속에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마음이 서로 다투게 해서는 안 된다.

⑧ 정의지심(正義之心)
항상 '한 가지의 불의를 행하고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얻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

⑨ 감화(感化)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는 악행을 가해오면, 나는 스스로 돌이켜 자신을 깊이 반성해야 하며 그를 감화시키려고 해야 한다.
한 집안 사람들이 변화하지 아니함은 단지 나의 성의가 미진하기 때문이다.

⑩ 수면(睡眠)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 서도 안 된다.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십분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든 일어나 두루 걸어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⑪ 용공지효(用功之效)
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되며,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부모께서 물려주신 이 몸을 형벌을 받게 하고 치욕을 당하게 하는 일이니,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

□ 글/이윤희(파주시문화예술진흥위원회 전문위원)

작성일 : 2008-09-10 조회수 : 8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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