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일 (수)
역사와 전통
청렴과 원칙에 충실한 삶, 오늘날 공직사회의 진정한 본보기
파주의 인물탐구 - 방촌 황희 선생
♠방촌 황희 영정♠

적성 훈도 부임, 파주와의 첫 인연
조선시대 청백리에 선정된 인물은 모두 217인이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청백리의 으뜸으로 여기는 분이 있으니 단연 방촌 황희 선생이시다. 청빈한 관직생활과 자상한 인품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채 90평생을 살다간 청백리 황희 선생. 선생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되돌아 보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황희 선생은 고려말인 1363년(공민왕 12) 개성(開城) 가조리(可助里)라는 마을에서 태어 나셨다. 어머니인 용궁김씨(龍宮金氏)가 선생을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선생이 태어나자 비로서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어릴적 이름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였으며 본관은 장수(長水), 호는 방촌(?村)이시다. 1376년(우왕 2) 음덕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綠事)에 임명되어 처음 관직에 나간 후 1389년(창왕 1) 별장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지금의 적성면) 훈도로 부임하는데 이것이 황희 선생과 파주와의 첫 인연이 된다.조선전기 화려한 관직 생활을 역임하고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황희 선생은 첫 인연을 맺은

우리 고장에 묻혀 오늘날까지 파주인들의 영원한 사표가 되고 있다. 또한 파주에는 황희 선생이 말년에 임진강변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반구정과 방촌영당이 자리잡고 있어 파주인들의 선생에 대한 선양은 만대에 전승되고 있다.

진정한 공직자의 본보기
황희(黃喜)선생은 조선초 태조(太祖)부터 세종(世宗)에 이르기까지 네 임금을 모시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명재상 이었다. 선생의 강직한 성품은 역대 임금들이 모두 인정을 하였지만, 실제로 선생이 자신의 능력을 꽃피운 시기는 세종때 이다. 세종(世宗)대에는 각 분야에서 수많은 인재가 발굴되어 나라를 이끌었다. 이것은 뛰어난 지도자의 존재가 국가 발전과 인물 양성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황희 선생 같은 정승(政丞)이 위로는 왕명을 잘 받들고 아래로는 적재적소에 인물을 기용하고 정사를 바로 이끌었기 때문에 세종 재위기에 이르러 국가를 발전하고 문화가 융성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뛰어난 명재상이면서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귀감이 되는 인물이었다.

성공한 관리로서의 일생
황희(黃喜) 선생은 열네살 때인 우왕(禑王) 2년(1376년)에 음직(蔭職)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스물한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2년 후에는 진사시(進士試)에도 급제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스물일곱살 때인 창왕(昌王) 원년(서기 1389년),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이듬해에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서른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불사이군,不事二君)며 72명의 고려 유신(遺臣)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문동의 고려 유신들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풀 뿌리와 나무 껍질로 연명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고 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갖은 방법으로 이들을 설득했으나 끝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흔히 말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결국 태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협박하기에 이르고,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고려 유신들은 충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 것 역시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황희 선생이 조선 조정에 홀로 출사(出仕)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에 출사한 황희 선생은 태종과 세종대에 특별한 신임을 얻어 주요 관직에 임명되었는데 특히 세종대에 이르러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65세 되던 해인 1427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9월, 모친상으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난 선생은 이후 파주 임진강 주변에 있는 반구정(伴鷗亭)에 칩거하며 지내다가 69세 되던 해에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적지 않은 나이에 관직의 정상에 오른 황희선생은 그때부터 18년 동안 명재상으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세종을 잘 보필하여 당대를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이끈 주역이었다.

♠반구정(사진 왼쪽)과 방촌황희선생 영당(사진 오른쪽),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위치♠

성품에 대한 많은 일화
황희선생의 품성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여름날, 시골길을 지나던 선생은 잠시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때마침 한 농부가 누런 소와 검은 소 두 마리를 데리고 일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희는 뙤약볕에서 고생하는 농부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잠시 쉬었다 하라며 말을 건넸다. 농부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선생은 별 뜻 없이 이렇게 물었다.

"두마리의 소 중에서 어떤 놈이 더 일을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황희선생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선생은 뜬금없는 농부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곡절이 있겠거니 하고 농부를 따라갔다. 밭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이르자, 농부는 선생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누런 놈은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는데, 검은 놈은 꾀가 많아 다루기가 힘들답니다."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줄 알고 따라온 황희선생은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다.

"아니 노인장, 그게 무슨 비밀이 된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말씀하시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저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안답니다. 내가 만일 아까 그 놈들 근처에서 이 얘기를 했다면 그 놈들이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의 말을 짐승이 알아들으랴 싶지만, 나는 내 집일을 애써 해 주는 그 놈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

농부의 사려 깊은 행동에 감동을 받은 황희선생은 그의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했다고 한다. 그냥 가볍게 흘려 버릴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인생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황희는 공적인 일에는 엄격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온후하고 자상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관련된 일화로, 하루는 어린 종 둘이 다투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황희와 마주쳤다. 그 중 한명이 상대방이 잘못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일렀다. 어린 종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들은 황희는, "그래, 네 말이 옳구나." 하고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다른 종은 주인이 상대의 편을 드는 줄 알고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렇다면 네 말도 맞구나." 하고 둘을 타일러 돌려 보냈다. 이때 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인이 타박하기를, "아니, 대감께서는 이 놈도 옳다, 저 놈도 옳다 하시니 어찌 그러십니까? 옳고 그름을 확실히 밝혀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정승께서 그리도 사리가 분명치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은 "맞소. 부인 말씀도 참으로 맞소." 하고 대답하여, 그만 부인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고 한다. 집에서 부리는 어린 종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황희선생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젊은 시절 깨달은 삶의 자세를 일생 동안 잃지 않고 지켜온 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황희선생의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일화는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원칙에 충실한 업무 자세
큰일이 닥쳤을 때 개인의 사욕을 버리고 당당하게 맞서는 공직자로서 황희선생의 참모습을 보여준 두 가지 일화가 있다. 먼저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제거한 사건이다.
태종의 왕후 민씨(閔氏)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도록 내조한 동지이자 이를 뒷받침한 1등 공로자였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병장기(兵仗器)를 숨겨 놓았다가 내 준 것도 민씨였고, 우물쭈물하는 남편을 말에 태워 거사에 내몬 것도 그였다고 한다. 그러나 민씨는 이방원(李芳遠) 못지 않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부부 간의 갈등이 매우 심했다. 특히 민무구, 민무질이 누이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후광을 등에 업고 조정에 갈등을 일으키자 이것이 큰 문젯거리가 되었다. 당시 형조판서로 있던 황희선생은 1408년에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국왕에게 올렸는데, 이것은 원경왕후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고 세자 또한 어려서부터 외갓집에서 자란 탓인지 외숙부들을 따르는 상황이라,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히 앞장설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외척의 폐단을 걱정하던 태종의 심중과 조정의 인심이 이미 민씨 형제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삭탈관직된 후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만다.

또 하나의 사건은 황희선생의 정치적 생명이 끝날 뻔했던 폐세자(廢世子) 사건이다. 세자 제(堤)는 파행을 일삼아 아버지 태종의 미움을 사서 결국에는 폐세자되고 마는데, 이때 선생은 세자를 폐하는 것은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극구 반대하였다. 황희선생이 내세운 반대의 논리는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건국 초에 태조가 세자를 잘못 세워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을 초래한 것처럼 세자를 바꾸는 것은 공연한 화를 자초할 수 있으며, 태종 자신도 그것으로 피해를 보지 않았느냐는 지적이고, 둘째는 지금부터라도 적장자 승계의 전통을 엄정히 세워 나가야 향후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말썽을 차단하는 본보기가 되어 국가 백년대계의 기틀을 튼튼히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세자가 아직 나이가 어리나 근본이 영리하고 총명하니 제대로 훈육한다면 충분히 군왕의 자질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결심이 워낙 확고하여 결국 세자는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바뀌였고, 황희선생은 좌천되거나 유배되고 만다.

이러한 선생의 곧고 바른 자세는 그에게 다소 거리감을 느끼던 사대부들조차 그를 완전히 인정하도록 하였다. 훗날 세종이 궐 안에 불당(佛堂)을 세우려고 했을 때, 모든 신하들과 유학자들이 동맹 파업까지 하면서 반대하자, 황희선생이 나서서 그들 모두를 설득해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청빈의 대명사
황희선생은 50년 이상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도 청빈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청빈함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일화를 살펴보자.

황희선생이 영의정으로 있던 시절, 세종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사전에 연락도 없이 선생의 집을 찾아왔다. 그때 마침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국왕의 방문에 허겁지겁 상을 한쪽으로 물리고 국왕을 맞았다. 세종은 선생의 집에 들어서면서 정승의 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초라한 모습에 이미 놀랐다. 그런데 방에 들어서니 바닥에는 장판 대신 멍석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먹다가 치워 놓은 밥상에는 누런 보리밥에 된장과 풋고추 너덧개만이 놓여 있었다. 세종은 민망해하는 황희선생을 보고, "경은 등이 가려우면 시원하게 긁기는 좋겠소. 자리에 누워 비비기만 해도 될 테니까." 하고 농을 하고는 돌아갔다. 이때 사실 세종은 황희선생이 가진 것이 너무 없어 막내딸의 혼수를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선생의 집을 찾은 것이었다. 다음 날 세종은 손수 공주의 수준에 준한 혼수를 선생의 집으로 보냈고, 이것은 이후 가난하여 결혼 준비를 하기가 어려운 관리들에게 국왕이 혼수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황희선생의 청빈한 삶의 자세를 알 수 있는 일 중에 이런 것도 있다. 언젠가 그의 아들 황치신이 집을 새로 짓고 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선생도 잠시 그곳에 들렀으나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돌아가 버렸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황치신은 아버지가 자신을 나무라는 뜻으로 알고 백배 용서를 구한 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집을 새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사실 황치신은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재물을 탐하였지만, 선생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엄중함 때문에 근신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 글/이윤희(파주시문화예술진흥위원회 전문위원)

작성일 : 2009-02-2 조회수 : 6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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