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일 (수)
역사와 전통
국내 유일의 조선시대 분묘 야외박물관
파주역사기행 - 파평윤씨 정정공파 종중묘역

조선(朝鮮)시대 분묘(墳墓)
분묘란 시체나 유골을 땅에 묻고 일정한 표시를 해놓은 곳으로 구묘(丘墓),구분(丘墳),분상(墳上),음택(陰宅),총묘(塚墓),유택(幽宅)등으로 불린다.어원적으로 볼 때 ‘묻다(埋)’라는 동사의 어간 ‘묻’에 명사화 접미어 ‘엄’이 붙어 ‘무덤’으로 표기된 것으로 ‘죽(死)+엄’이 ‘주검’으로 표기되는 것과 같은 예이다.
무덤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대개 두가지로 집약되는데 그 하나는 사체의 처리물이라는 관점이고 또하나는 사람의 기념적 형상물 이라는 관점이다. 전자는 사람이 죽으면 수일내에 부패하기 시작하여 악취가 풍기고 보기에 흉측하므로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 처리방법의 하나로 무덤이 생겼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사체의 처리방법에는 생활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체를 바위나 나무위에 얹어 놓으므로해서 금수에게 처치를 맡기는 풍장(風葬),강변이나 해변에서 물속에 가라앉힘으로서 물고기에게 처치를 맡기는 수장(水葬),급속히 진행되는 사체의 부패를 막기위한 화장(火葬)등이 있다. 즉 이와 같은 방법의 일환으로 시체를 땅에 뭍어 사체의 부패를 막는 매장(埋葬)의 방법으로 생겨난 것이 무덤이라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공동생활의 일원이 죽으면 슬픈 감정이 우러나고 그리운 정이 생기므로 그를 추모할 어떤 기념적 형체로서의 무덤이 만들어 졌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의 견해가 선후의 시간적 차이는 있으나 함께 혼용되는 의미로서의 무덤이 기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조형과 조경

무덤을 흔히 유택(幽宅)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사자(死者)가 저승에서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또 왕의 무덤인 능(陵)을 능침(陵寢)이라 하는데 이것 역시 사후에 편히 쉬는 곳을 뜻하는 말이다. 이와같이 무덤은 사자가 사는 집,또는 쉬는 곳이라는 관념이 선사시대로부터 이어져 왔으며 이에 따라 무덤을 지키고 가꾸는 조형과 조경의 역사도 무덤의 역사와 함께 오래된 것이다.
무덤의 조형과 조경은 무덤의 보호와,미화,기념표지등의 세가지 측면에서 조성되었는데 보호적 측면은 비로 인한 유실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붕괴하는 따위의 기상적 피해,동물의 침범,산불의 연소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조처를 하였다. 이를 위해 묘역에 묘수(墓樹)를 심어 방풍과 산화를 방지했으며 봉분아래에 호석(護石)을 쳐 붕괴와 동물들로부터의 침해를 막기위한 조치를 취했다. 또 묘수(墓守)나 산지기등을 두어 묘역을 보호하였으며 4세기 무렵부터 중국의 원형봉분이 들어오면서 묘주위에 잔디를 입혔는데 이 또한 조경적 미화와 아울러 무덤의 유실이나 붕괴를 막고자 한 조처였다. 또한 묘역의 조형물들은 매우 다양하게 설치되었는데 석수(石獸),석인(石人),상석(床石),장명등(長明燈),곡장(曲墻),망주석(望柱石)등은 모두 묘를 보호하거나 미화 또는 기념적 표시물로서 설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덤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
무덤을 ‘사자의 집’이라고 보아온 관념은 동서양이 거의 같다. 한국인의 무덤에 대한 의식은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역사와 함께 변천되었다. 우리 고대인들은 조상과 자손이 생사를 초월해서 하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므로 조상의 죄과는 그 자손을 해치고 그 반대로 조상의 공훈은 수대에 걸쳐 자손에게 은덕을 미친다고 믿었다.이러한 생사를 초월한 가족 공동체 의식과 계세사상은 유교사상과 접하면서 좀더 내면화,도덕화하게 되었다. 조상을 숭배하고 무덤을 소중히 하는 유교적 의식은 내 생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조상의 유택인 무덤을 잘 가꾸고 보존하여야 한다는 사상과 조상의 무덤은 효도를 가르치는 산 교육장이라는 생각이다.

무덤과 풍수사상
우리나라의 무덤이 일찍이 풍수도참사상과 결부되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 사람이 사는 터를 양기(陽基)라 하고 죽은 사람의 집인 무덤을 음택(陰宅)이라 하여 좋은 양기에서 살면 부귀 다자손하여 행복하고 좋은 음기에 조상을 모시면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발복(發福)한다는 것이 풍수지리적 사고이다. 조상의 시신이 이미 유명을 달이 하였다 하더라도 자손과 연결된 기(氣)는 그대로 유지되어 자손에게 길흉화복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따라서 조상의 시신이 명당에 묻히면 자손이 번창하고 흉지에 묻히면 온갖 재앙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풍수지리 사상이다. 그리하여 조상을 명당에 묻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고 그로 인하여 무덤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많았다.
길지의 선정은 전문적 술사인 지관(地官)의 힘을 빌리는데 지관은 산맥의 흐름을 보는 간룡(看龍),혈점을 향하여 산세가 수렴되는 것을 보는 장풍,주위 하천의 물흐름을 보는 득수,관을 안치할 광을 정하는 재혈(裁穴),방향의 길흉을 정하는 방위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한다.

조선시대 분묘의 특징
조선의 무덤은 고려시대의 전통형식을 바탕으로 거기에 새로운 지도이념인 유학사상으로 보완되어 진다. 석곽묘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석실도 거대한 석곽 또는 석관형으로 변하였다. 화장묘가 사라지고 중국식 토광묘가 일반화하고 고려시대에 이어서 풍수지리사상이 더욱 보편화 되었다. 부장물로는 백자등 자기류가 주로 애용되었다. 외형은 초기의 원형과 장방형에서 중기 이후에는 거의 원형분으로 정형화 하고 묘비가 일반화 하며 고관의 무덤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게 된다.

조선시대 분묘 야외박물관 파평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
교하읍 당하리, 와동리 일대의 파평윤씨 정정공파 교하종중의 선산(762,413㎡)에는 정정공(貞靖公) 윤번(尹?)을 중시조로 하는 정정공파의 묘역 96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 묘역은 조선시대의 묘역이 한 종중에 의해 연대별로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묘역의 역사적 계기성을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이 곳은 택지개발로 인하여 훼손의 위기가 있자 정정공파 종중에서는 최근 종중회의를 통해 이들 묘역을 보존하기위해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 신청 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조만간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 보존 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곳의 묘역에 조성되어 있는 묘제 및 석물,각종 묘비등은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시대별 특징과 함께 역사적,묘제적,미술사적,복식사적 측면에서 상당한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이러한 조선시대 분묘의 특징을 한곳에서 답사 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왕비의 부친인 부원군 묘 3기등 중요 묘역 다수
정정공 윤번(尹?,1384(우왕10)-1448(세종30))은 이 곳 묘역의 가장 큰 어른이다.
자는 온지(溫之), 세조의 장인이며 고려말 판도판서 승례(承禮)의 아들이다. 딸이 수양대군(세조)의 부인(정희왕후)이 되자 군기시부정이 되고 이어 공조참의가 되었다. 1434년 이조.호조의 참판을 거쳐 1439년 경기도관찰사,대사헌등을 지내고 1440년 우참찬,공조판서에 이어 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풍병으로 사직하고 1447년 판중추부원사가 되었다.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묘역은 교하읍 당하리 산5-3에 위치하는데 묘역은 2기로 상단에 윤번묘, 하단에 부인 인천이씨의 묘가 배치. 윤번의 묘는 봉분을 장대석을 이용한 방형의 호석을 두른 방형 봉토분으로 대형의 호석을 이용한 봉분 형태. 묘역의 석물은 묘표1기, 상석1기, 장명등1기, 문인석2기가 조성되어 있다.


윤여필(尹汝弼,1466(세조12)-1555(명종10))은 중종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아버지이며 참판을 역임한 보(甫)의 아들이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3등에 녹훈되고 이듬해 딸이 숙원(淑媛)에서 왕비로 책봉되자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에 봉해지고 판돈녕부사에 올랐다.1527년(중종22) 동궁에서 저주하는 물건이 나오자 이를 우의정 심정에게 알려 조사하게 하였고 그뒤 아들 임(任)과 함께 후일의 인종(仁宗)이 되는 세자의 보호에 진력하면서 윤원형등의 소윤파와 대립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때 아들 임이 종사를 어지럽게 한 죄로 사사되었는데 이때 80세의 노령에다 선후(先后)의 아버지이므로 관직에서 파면은 되었으나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의 덕으로 특별히 용인에 부처되었다. 1551년에 풀려났으며 사후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윤지임(尹之任,? -1534(중종29))은 자는 중경(重卿), 내자판관을 지낸 욱(頊)의 아들이며 중종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아버지이다. 1514년(중종9) 딸이 중종의 둘째 계비로 간택되자 정치적 입지가 넓어져 1519년 영돈녕부사에 이어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나갔다. 1522년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으로 봉군되었다.
아들인 원형(元衡)은 소윤파의 영수가 되어 대윤 윤임 일당을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왕실의 외척으로서 전횡을 일삼았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이들 부원군묘 3기 외에도 윤사흔, 윤계겸, 윤원형, 윤원로, 윤원필, 윤여해 등 중요 묘역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 글 : 이윤희(파주시문화예술진흥위원회 전문위원)

작성일 : 2008-10-16 조회수 : 8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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