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일 (수)
역사와 전통
분단의 역사와 문화의 보고, DMZ를 가다
파주문화 역사기행 - DMZ편

DMZ(비무장지대)는 한국전쟁 후 남북이 합의한 완충지대로 서로 무장을 할 수 없는 지역을 말한다. DMZ의 구역범위는 군사분계선(또는 중앙분계선, MDL)으로부터 양쪽 2km구간으로 현재의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의 구역을 말하는데 이 구역은 한국전쟁 이후 약 50년간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린 곳이다.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정지되어 버린듯한 DMZ. 수많은 생태계의 꿈틀거림은 이 곳 비무장지대를 세계에서 찾아보기 드믄 생태계의 보고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이제 비무장 지대는 더 이상 멈추어버린 공간이 아니다. 남북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가 이제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개방의 물결이 일고 있다.

특히 우리지역에 위치한 DMZ구역은 요즘 남북간 경의선 철로와 도로 복원사업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연결된 철로와 도로를 통해 남북이 서로 오고 가는 절차만을 남겨 놓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 그 분단의 장막인 DMZ, 그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분단의 역사와 문화를 따라가 본다.

남북의 유일한 대화창구 판문점
판문점은 남북분단의 아픔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대립의 현장인 동시에 통일을 향한 화해와 대화의 창구 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른 남북분계선위에 위치한 ‘공동경비구역(JSA)'인 이 곳 판문점은 남북을 가로막은 휴전선 155마일의 장벽 중 유일하게 남북을 연결해주는 ’열린 땅‘으로서 한민족의 기대가 쏠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판문점은 1951년 휴전회담 이후 남과 북의 영구적 회담장소가 되었는데 그 동안 남북적십자회담을 비롯해 남북조절위원회, 남북체육회담, 남북경제회담, 남북고위급회담 등 수차례의 회담이 열린 곳이다. 판문점(板門店)은 본래 마을사람들이 ‘널문리’라고 불렀던 조그만 주막거리였는데 널문리는 ‘널빤지로 만든 문짝’이라는 뜻으로 그것을 한자 표기한 것이 판문점 이다.

판문점은 영화 「JSA(공동경비구역)」로 잘 알려진 UN군에 의해 경비가 이루어지는 공동경비구역으로 중립국감독위원회 본부가 설치되어 있어 각 국의 감시위원이 상주하고 있다. 공동경비구역은 휴전협정 체결에 이은 1954년 11월 8일자 협약에 따라 설치되었는데 당시 협약의 주요내용은 남북 4km의 비무장지대내에 군사정전위원회 본부지역을 설정하여 그 안에 지름 88m의 공동경비구역을 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판문점은 유엔군과 공산군, 즉 쌍방의 군대가 ‘공점공유(共占共有)’하는 지구상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구역으로 남아 있다. 판문점에는 7채의 콘셑 건물을 중심으로 남쪽에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 북쪽의 ‘판문각’과 ‘통일각’을 비롯해 몇 개의 경비초소로 이루어져 있고 남북한의 연락사무소가 각각 설치되어 있다.

♠공공경비구역(JSA)내 판문점♠


우리는 판문점하면 가장 인상깊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검은 썬그라스를 낀 채 마치 로봇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는 우리측 사병의 모습이다. 또한 북측의 판문각 쪽에서 망원경을 통해 바라보는 북한 병사들의 모습도 판문점의 대표적인 연상이미지 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는 그 동안 여러차례의 군사적 충돌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76년 8월 18일 벌어진 ‘8.18도끼만행사건’ 이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45분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북한 경비병들이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 경비하던 유엔군 경비병을 기습한 사건으로 미군 장교 2명이 피살되고 유엔군측 경비병 9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당시 미국 키신저 국무장관은 사건의 해명과 보상을 강력히 요구하고 보복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사건 3일 뒤인 8월 21일 오전 7시 유엔사령부는 헬기26대, 전투기 및 B52 폭격기 3대가 엄호비행하는 가운데 110명의 한미 양국군 기동타격대를 출동시켜 문제의 미루나무를 제거하였다. 당시 이 사건은 휴전협정의 산실이었던 판문점이 재 전쟁의 발단 장소로 돌변할 뻔 했던 사건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판문점 내에도 군사분계선이 그어져 회의장 내에도 정 중앙에 남과 북의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자유의 마을 대성동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 안에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으니 바로 ‘자유의 마을 대성동’ 이다. 문산읍 마정리 통일대교를 넘어 임진강 북안으로 들어가면 민통선 지역인데 우리지역 민통선내 마을은 ‘통일촌 마을’ 과 ‘ 대성동 마을’ 그리고 최근에 조성된 ‘해마루촌’ 등 3개 마을 이다. 그러나 통일촌과 해마루촌 마을은 비무장지대 남방에 위치한 마을인데 반해 대성동마을은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한 특수성을 지닌 마을이라 할 수 있다. 통일대교를 건너면 바로 좌측에 통일촌 마을이 보이고 판문점 방향으로 가다보면 공동경비구역인 JSA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다. JSA 사령부를 통과하면 바로 대성동 마을과 판문점으로 진입하는 도로가 갈리는데 좌측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대성동 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로 마을 북동쪽 1km 지점으로 판문점이 보인다.

마을앞 약 400여미터 전방으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으며 그 건너로 북한 마을인 기정동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성동 마을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대한민국정부가 아닌 유엔군사령부의 통제하에 있으면서 실질적으로는 대한민국정부의 통제권을 적용받고 있는 특수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또한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이 마을 주민에게 주어지는데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거주이전의 자유를 포함해 생활에 불편을 느끼는 각종 제한은 특혜의 반대적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대성동 마을은 한국전쟁 개전 후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주민과 1953년 피난갔던 청장년들이 귀향하면서 30세대 약 160여명이 거주하게 되면서 정착하게 되었는데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에 의해 비무장 지대내 거주하던 주민들의 거주가 허용되면서 오늘날 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휴전 협정 체결 이후 귀향은 허용되지 않았기에 이때까지 대성동에 귀향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성동에 돌아올 수 가 없었다. 1963년부터 대성동 마을은 미 제1기갑사단 민사처에 소속된 민정반이 마을에 상주하면서 대성동 마을에 대한 제반 행정적 지원을 하고 있는데 지금도 대성동 마을을 출입 하려면 반드시 민정반에 들러 출입을 신고해야만 한다. 민정반은 대성동의 민사행정 뿐 아니라 휴전협정을 수행하며 마을내부 경비, 마을 주민의 복지, 그리고 구호업무 등에 대한 제반 조치에 관한 임무를 수행한다.

대성동 마을의 주요시설로는 우선 유일한 교육기관인 대성동초등학교가 마을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성동초등학교는 1968년 정식 인가되어 현대식 건물과 첨단 교육자재를 갖추고 이 마을 학생들의 교육을 전담하고 있다. 대성동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서울, 인천, 파주 등지로 학군에 관계없이 자유로이 진학 할 수 있는데 매년 두 세명이 졸업하는 대성동초등학교의 졸업식은 마을의 커다란 잔치이자 우리나라 학교 졸업식 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

대성동 마을에서 또하나 눈에 띠는 것이 있는데 바로 민정반 사무실 옆에 설치한 국기 게양대 이다.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에 이루어진 대성동 제2차 종합개발 공사시 세워졌던 국기 게양대는 당초 85m로 설계되었으나 국기봉이 짧아 국기의 손상이 심하고 게양과 하기시에 국기가 손상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해 1981년 12월부터 1982년 1월에 걸쳐 보수공사를 실시 국기봉의 높이를 15m 더 높여 현재 국기게양대의 높이는 100m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성동 마을과 마주한 북한 기정동 마을도 종래 80m의 인공기 게양대를 제거하고 약 165m에 이르는 게양대를 새로 만들어 세워 마치 양 국기게양대의 크기를 가지고 심리전을 벌이는 듯 하다.

마을은 전체적으로 가운데 중앙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경지정리 하듯이 주택들이 들어서 있으며 가운데 중앙로 끝에는 가장 북한 지역과 가깝게 접근 할 수 있는 곳으로 팔각형 모양의 정각을 지어 소상히 북한 지역을 조망하도록 하였다. 평소에도 이 곳에 오르면 북한지역 초병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농사철이면 북한의 농민들이 일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 온다.

제3땅굴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계속적인 무력 침략 정책으로 각종 도발을 일삼아 왔다. 그 중 대표적인 북한의 무력 도발책 중의 하나가 남침용 땅굴인데 지금까지 밝혀진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모두 4개소이다. 이를 발견한 순서에 따라 제1땅굴~제4땅굴로 명명 하고 있는데 우리 지역 비무장지대내에 「제3땅굴」이 위치해 있다. 1978년 6월10일에 발견된 제3땅굴은 폭 2m, 높이 2m, 총길이 1,635m로 제2땅굴(철원 소재)과 거의 같은 규모이며 판문점 남방 4km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땅굴은 아치형으로 1시간에 3만여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로 이전에 발견된 제1.2땅굴보다 훨씬 위협적인 것이었다.

위치가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km, 통일촌 민가에서 3.5km밖에 안되는 곳으로서 서울까지는 불과 44km 지점이다. 현재는 파주시에서 개발한 민통선 지역내 안보관광지의 대표적 관광지로서 1일 천여명의 관광객이 제3땅굴을 찾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관광객들의 땅굴 내부 관람을 쉽게 하기위해 셔틀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45명이 승차해 약 15분만에 땅굴 내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관람 할 수 있도록 도보 관람로를 별도로 조성하였다. 땅굴 관람을 위해 또다른 땅굴을 판 셈이다. 또한 이 곳에는 DMZ 영상관을 설치해 DMZ의 분단의 역사와 자연 생태계의 영상을 담은 입체영상물을 감상 할 수 있고 또 전시관에는 DMZ 전쟁관련 유물 및 관련 자료의 도판(圖版) 전시를 해 놓았다.

♠파주시에서 관광객 편의를 위해 건설한 역갱도(사진왼쪽)과 제3땅굴 내부(사진오른쪽)♠


도라산역

최근들어 우리고장에 있는 도라산이 화두가 되고 있다. 남북관계의 개선에 따라 경의선 철도 복원사업이 진행되면서 경의선 종착역으로 도라산역이 신설되었고 부시 미국대통령이 도라산역을 방문 우리나라 대통령과 함께 ‘도라산 선언’을 하면서 역사속의 도라산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도라산은 옛 장단군 중서면(中西面), 진남면(津南面)에 있는 산으로 1905년 경의선 개통으로 읍내리의 장단군 청사가 도라산 뿍쪽 동장리로 이전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중서면 도라산리 일부와 진현내면의 백연리. 원당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라산리라 하였다.

1934년 이 지역은 장단면으로 개칭되었고 1972년 12월 28일 법률 제2395호로 파주군에 편입 되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도라산은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리에 속해 있다. 도라산과 관련된 구전 기록을 보면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때때로 이 산에 올라가 놀이를 즐겼는데 그때마다 꼭 궁인(宮人) 무비(無比)를 데리고 갔으므로 사람들은 무비를 가리켜 <도라산(都羅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무비는 태산군(泰山郡) 사람 시씨(柴氏)의 딸인데 미모단정(美貌端正)하여 궁중에 뽑힌 여인이었다. 궁중에 들어온 무비는 왕의 총애를 한몸에 지녔다고 할만큼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무비는 후일 낭장(郎將) 이 곤(李琨)과 사통(私通)하여 궁중(宮中)을 문란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도라산의 경개(景槪)를 가히 짐작 할 수 있다.

또다른 구전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10년 (879) 경순왕은 신라도읍 경주에서 송도를 찾아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니 태조는 낙랑공주를 경순왕과 혼인케 하여주고 유화관(柳花官)을 하사하고 정승에 봉하는 한편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주는 등 극진히 예우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슬픔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경순왕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짖고 머물렀는데 그곳이 영수암(永守菴)이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곳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렸다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 호칭되게 되었다한다. 고려 경종3년(935)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골짜기(현재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안장했으며 그후 낙랑공주는 영수암을 새로 단장하고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 불렀다한다.

도라산은 임진강을 경계로 북안지역이며 고려 왕조의 수도 開京과 이웃하는 곳에 위치해 고려문화권에 속한 지역이다. 우선 고려 의종(毅宗)때 문신들의 사치.오락.부화등 경박한 풍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신들의 반란이 일어났던 곳이 도라산 북쪽 진서면 조산(현 판문점 부근)에 소재한 보현원(普賢院)이다. 의종24년(1170) 8월 왕이 문신들을 데리고 보현원에 놀이를 나갔는데 이때 왕을 호종하였던 대장군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등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호종하던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렸으며 그날 밤으로 왕을 개성으로 데리고 들어와 중요 문신 50여명을 또 학살하였다. 보현원은 국조(國朝)에서 조현역(調絃驛)을 설치했던 곳이며 인근의 내(川)가 도원역(桃源驛) 상류에서부터 내려와 보현원 북쪽에 이르러 천천히 흘러 웅덩이가 되었는데 고려 의종이 둑을 쌓고서 못을 만들어 놀이하는 곳으로 삼았던 곳이다. 정중부가 난을 일으켰을 때 문신들을 모두 죽여 시신이 못에 메이게 되니 사람들은 그 못을 <조정침(朝廷沈)>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라산역 전경♠


도라산 북동쪽 옛 장단군의 치소가 자리했던 해발 227미터의 백학산(白鶴山)은 일명 백악(白岳)으로 장단지(長湍志)에 보면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신궁지(新宮址)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유지(遺址)는 향교동(鄕校洞-현재 장단향교터 인근)부근 이라는 설이 있다. 여지승람에 고려에서 풍덕(豊德) 백마산(白馬山)을 우소(右蘇)로 삼고 백악(白岳)을 좌소(左蘇)로 삼았다고 적고 있는데 공민왕 9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도읍을 남경(南京=한양)으로 옮기려고 태묘(太廟)에서 점을 쳐 보니 불길하여 결국 옮기지 않고 이때 왕이 친히 백악에 거동하여 땅을 살펴보고 산 남쪽에 대궐을 지었는데 주위가 720보(步)였으며 사람들이 신궁(新宮)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라산에서 북쪽 정면으로 오관산(五冠山)이 위치하고 있는데 산봉우리에 다섯 개의 작은 봉우리가 마치 관(冠)처럼 보인다하여 그 이름이 오관산이다. 고려시대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이 이 산아래 살았는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송도(松都)까지 30리 거리를 조석(朝夕)으로 출사(出仕)하여 받들어 모셨다. 이리하여 문충공은 효자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고 하며 어머니를 위하는 시가(詩歌)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된 <목계가(木鷄歌)>이다.

木頭雕作小唐鷄 筋子?來壁上樓
此鳥膠膠報時節 慈顔始似日平西

나무를 깎아 작은 당닭 한 마리를 만들어
젓가락으로 찍어다가 벽위에 올려 앉혔네
이 닭이 꼬끼오 꼬끼오 시간을 알리니
우리 어머니 얼굴이 비로서 해가 서쪽에 편평한 것과 같아라

도라산 전망대
도라산 정상은 우리에게 도라산 전망대가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시대 도라산 정상에는 교통통신 수단의 하나인 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주지역의 봉수는 전국에 걸친 조직중 서울의 모악(母岳)과 개성의 송악산 국사당을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하였는데 문헌 기록에 검단산 봉수(형제봉 봉수), 봉암리 봉수(대산봉수), 도라산 봉수의 세 곳의 봉수가 존재했었다. 그 중 도라산 정상에 위치했던 도라산 봉수는 북쪽으로 개성 송악의 천수산(天壽山) 국사당(國師堂)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파주 봉암리 대산(大山)봉수에 응했던 봉수이다.

도라산은 167미터의 고지로 봉암리 대산과 더불어 비교적 낮은 고지이지만 주위지역이 평탄하여 감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늘날에도 전방의 적정을 관측하기 위한 군시설물이 설치된 것도 동일한 역사적 관점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는 도라산 전망대를 오르다가 우측으로 올라가면 군부대 소대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곳에 봉수대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고 있다. 도라산 전망대는 도라산 정상에 조성된 북측 조망 전망대로 전방에 개성 송악산을 비롯해 개성 시내가 한 눈에 조망된다. 1986년 9월8일 사업비 3억원을 들여 국방부에서 설치하였으며 북측을 조망할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장단역과 열차화통, 그리고 죽음의 다리
최근 경의선 철로와 도로복원 사업은 50여년을 굳게 닫아 두었던 비무장지대의 철문을 열게 했다. 남북 합의에 의해 역사적인 경의선 복원이 추진되었고 결국 남북 경의선 철로가 50년만에 이어지는 감동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분단의 현장, 50년간 멈추어 버린 이 곳 현장에는 어느 곳 보다도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현재 경의선 철로 복원으로 종착역이던 문산역에서 임진강역을 거쳐 도라산역까지 2개 역이 신설되었는데 한국전쟁 이전 경의선 열차가 서던 역은 비무장지대내의 장단역이며 다음 역은 북한 지역의 봉동역 이었다.

현재의 도라산역에서 약 1km 전방 남방한계선 너머에 장단역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장단역 플랫폼 못미쳐 한국전쟁때 폭격을 맞아 멈추어 버린 열차 화통이 50년을 그 자리에 그대로 지키고 있다. 이 곳에 살던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이 열차는 화물을 운반했던 열차로 문산역을 떠나 장단역에 도착하기 직전 폭격을 맞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말해주듯 화통 전체에 붉은 녹이 슬어 있으며 잔해 속을 뚫고 자란 나무 한그루가 모진 고통 만큼이나 크게 자라 있다.

♠경의선 기차화통 모습, 현재는 복원을 위해 임진각 관광지로 옮겨 보관중입니다♠


원래 경의선 철로가 이 화통이 서있는 위치 그대로 인데 최근 복원시 약 3미터 간격을 두고 철로를 조정 복원하여 열차 화통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장단역은 한국전쟁 이전만해도 역세가 매우 컸던 곳으로 역 주변으로 장단 시가지가 형성되었으며 장단역 플랫폼과 별도로 화차대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각종 물산이 이 곳 장단역에서 나고 들던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실제 이번 경의선 철로 복원사업 과정에서 실시된 지표조사와 현지에 살던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장단역 주변에는 많은 금융조합 건물들이 있었고 인적 물적인 왕래가 활발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무성한 갈대와 이름모를 들꽃만이 사계절을 바꿔가며 생명을 키워내고 있다.

장단역으로 들어가기 약 300여미터 전에는 철로를 가로지르는 조그만 교량이 남아 있는데 일명 ‘죽음의 다리’로 불리고 있다. 증언에 의하면 이 다리는 장단에서 연천의 고랑포로 나가는 유일한 국도의 연결 교량으로 경의선 철로 위로 놓여진 다리이다. 이 다리가 ‘죽음의 다리’로 불리게 된 것은 한국전쟁시 중공군의 재 공격상황에서 이 곳에 진을 치고 있던 무수한 우리측 병사들이 몰살을 당했다고 하는데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당시 이 일대의 전투상황을 볼 때 수많은 아군 병사들이 이 곳에서 목숨을 잃어 ‘죽음의 다리’로 불려진게 아닌가 한다. 죽음의 다리는 철로로부터 8m높이로 길이 7.2m, 폭 5.5m의 소규모 교량이다.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보존 상태이나 교량 하단부의 부식이 있어 추가 보강을 해야 할 것 같다.

장단역에서 서쪽 능선으로 약 7백여미터 떨어진 옛 장단면 동장리에 장단면청사 건물이 남아 있는데 한국전쟁 이전까지 이 곳 장단면의 행정업무를 관할하던 면사무소 였다. 건물의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로 외형상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되고 있는데 건물의 골조는 그대로 남아 있으나 부식과 콘크리트의 탈락이 심한 상태이다. 건축의 연면적이 295.4㎡이며 높이가 3.5m의 아담한 건물구조이다.

이 일대는 현재 비무장 지대내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으나 머지않아 남북간 경의선 열차가 개통되면 이 일대에 대한 관광도 실현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비무장 지대내의 대표적인 근현대 전쟁유적인 장단역사와 열차화통, 죽음의 다리, 그리고 옛 장단면 청사 건물등이 최근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글/ 이윤희(파주시문화예술진흥위원회 전문위원)

작성일 : 2008-12-11 조회수 : 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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