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4일 (목)
역사와 전통
성인(聖人)들의 고향, 파주
- 파산서원과 성리학자들 -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국의 공자와 맹자가 살고 있던 노(魯)와 추(鄒) 두 나라에 비한 것이며, ‘성인이 태어난 마을’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동과 예안을 흔히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하지만, 파주도 ‘조선의 추로(鄒魯)’라는 지칭을 받았던 곳이다. 수은 강항(睡隱 姜沆)이 파산(坡山)을 ‘노나라처럼 어진 사람이 많다’고 하였고, 숙종 대 파주 유생들이 “파주고을은 평소에 우리나라의 추로라고 불리었다(坡州一邑 素號我東鄒魯)”고 말하기도 했다.


 
파산서원 전경


파주가 추로지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호학파의 산실이자,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걸출한 대학자가 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이다.


우계 성혼
이미 널리 알려진 율곡과 함께 파주를 대표하는 유학자 우계 성혼은 파평면 늘노리 우계(牛溪)에서 살면서 우계를 호로 삼고, 평생을 파주를 떠나지 않고 살다가 64세에 작고하여 파주 향양리 아버지 성수침 묘 위쪽에 묻혀있다.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은 당대의 걸출한 학자였던 성수침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나 10살 때 부친을 따라 우계로 들어와 살았다. 아버지는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었는데 당시 기묘사화로 인해 스승 조광조가 제거되는 것을 보고, 출사의 뜻을 접고 처가가 있는 이곳 파평 늘로리 우계(牛溪)에 죽우당(竹雨堂)을 지어 정착하게 되었다.



파산서원 사묘전경


파산서원 뒷산 무정산은 현재 마을 사람들은 ‘우계산’이라고도 부르는데 늘노천을 앞에 둔 이 마을에 내려와 지내면서 스스로를 죽우당(竹雨堂), 파산청은(坡山淸隱), 우계한민(牛溪閒民)이라고 칭하면서 이 곳에서 은거하였다.


이 당시 파주의 월롱산 자락에는 역시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 백인걸이 살고 있었는데 성수침은 백인걸과 교유하면서 아들 성혼의 교육을 맡겨 성혼은 아버지 성수침과 휴암 백인걸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성혼은 몸이 허약하고 늘 질병에 시달려 수많은 관직을 제수 받았어도 번번히 사양하였고, 관직에 나아갔어도 짧은 기간 복무하고 늘 고향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과거를 보지 않았어도 율곡이이와 주위 유학자의 추천을 받아 선조임금의 부름을 받았는데 율곡이 사망한 이후에는 동서분당의 정치권에서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의 공격과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성혼은 고향에서 많이 머무르며 자신의 명망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학생들을 위해 우계서실을 열고 가르쳤으며 22조목의 학칙인 서실의(書室儀)를 짓기도 했다.


파주 삼현(坡州三賢)의 학문과 우정
우계 성혼이 고향인 파평면 늘노리(우계)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율곡리에 살던 율곡 이이, 교하 구봉산(심학산) 자락에 거주하던 구봉 송익필과 만난 것은 20세 때였다.


이들은 ‘파주삼현(坡州三賢)’이라 일컬어지며 평생을 변치 않는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심도 있는 학문적 토론과 우정을 나누며 함께 발전해 나갔다. 이 세 학자의 문하를 드나들면서 공부했던 기호지역의 사림들은 김장생, 김집, 이귀, 조헌, 오윤겸, 윤황, 황신, 신응구, 정엽, 김권, 김류, 김상용, 신흠, 강항, 이정구, 김육 등이 있다. 이들은 후에 퇴계 이황 및 남명 조식의 문인 중심의 영남학파와 대립하면서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기호학파란 경기와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성리학자들을 일컫는다. 성혼, 이이를 종장으로 하는 기호학은 처음엔 파산학파로 불리기도 했다. 파산의 성리학은 충남 논산 노성면에서 올라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한 윤황과 그의 동생 윤전으로 인해 논산 노성면의 파평 윤씨 문중의 가학으로 전승되어 윤선거, 윤증으로 이어진다. 윤황은 성혼의 제자이자 사위가 되어 조선 도학의 학맥을 이어받아 호서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한 것이다.


이후 구봉과 율곡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과 아들 김집도 충남 연산, 회덕 지방에서 구봉 송익필의 예학을 완성시켜 나갔고, 그의 제자 송시열이 이어받으면서 충남의 노성, 연산, 회덕이 기호학파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기호성리학의 근본은 바로 파주 지역이면서 그 중심에 파산서원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파산서원은 안동의 영남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 못지않게 중요한 역사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겠다.


우계 성혼의 학맥을 이은 파산서원
파산서원은 처음에는 청송서원으로 불렸었다. 우계 성혼의 아버지인 성수침이 작고하자 그를 제향하기 위해 율곡 이이와 휴암 백인걸이 주도하여 청송서원(聽松書院)을 세웠다. 1650년(효종 1)에 백홍우가 상소를 올려 청해서 마침내 ‘파산서원’으로 사액 * ¹ 됐다.



청송 성수침과 아들 우계 성혼의 위패



기호학의 본산인 파산서원은 소론의 거점 역할을 하며 수많은 후학을 배출하면서 존속해왔다. 1871년(고종 8)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선현제향과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조선 말 고종 때 조현규 선생이 이승만 전 대통령, 여운영, 조소항, 박찬익 등 많은 정치가와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다. 그만큼 파주의 파산서원은 기호지역 멀리서도 공부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명문학당이었다.


파산서원은 우계 성혼의 신주를 모신 이후, 우계의 학맥을 이어가는 파주 사족의 중심거점이 됐다. 이후 1664년(현종 5)에 외손인 윤선거가 우계의 연보를 편찬하고, 1681년부터 1682년까지 아들 윤증과 더불어 우계문집의 속집을 펴내게 된다. 그리고 1681년에는 우계 성혼이 율곡 이이와 함께 문묘(文廟)에 배향 됐다.


 
경현단


파산서원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20여 년 후인 1611년(광해군 3)에 율곡과 우계의 후학들과 파주의 사족들에 의해 다시 중건됐다. 파산서원 상량문을 보면 이 때 이곳에는 사현(四賢: 성수침, 성수종, 성혼, 백인걸)이 배향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파산서원 사당


파산서원은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불에 타 소실되었고, 1966년에 사당만 복원됐다. 강당 찰륜당(察倫堂)은 1976년에 중건했고 현재 사당 건물은 1977년에 다시 복원하여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됐다. 사당에는 성수침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성수종·백인걸·성혼을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파산서원 향사



*1. 사액 :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을 내림
*2. 배향: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


• 파산서원
  위치 : 파주시 파평면 파산서원길 24-40


취재 : 권효숙 시민기자

작성일 : 2016-02-16 조회수 : 3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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