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2일 (목)
역사와 전통
임진강 따라 만나보는 옛 정자
-반구정과 화석정, 그리고 사라진 정자-

파주에는 적벽을 가진 아름다운 절경의 임진강이 있어 예로부터 강변에 많은 누정이 건립되었다.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는 사족들의 문화공간으로 학문을 도야하거나, 정세와 문학을 토의하거나, 후학을 위한 강학의 장소이거나  학맥과 인맥을 엮어나가는 친목과 교류의 장이 되기도 한 중요한 장소이다.
파주는 특히 문향의 고장답게 학맥으로 이어진 무수한 선비들의 방문객이 많았고 경치 좋은 곳에는 유명 인사들의 정자가 많이 건립되었다.
임진강 주위는 장단적벽과 동파적벽, 임진적벽 등 자연지형의 경관이 아름다워 중국 북송 때 소동파가 유람하던 황주의 적벽에 비유되어 수많은 시인묵객의 시와 기행문에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 옛 지도에도 많은 정자들이 임진강 주변에 그려져 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황희의 반구정과 율곡 이이의 화석정 외에는 다 사라지고 없어 아쉬울 뿐이다.
홍수 또는 전쟁으로 인해 사라지고 없는 임진강변의 옛 정자들이 임진강 아름다운 적벽 위에 날렵하게 자리 잡았던 모습을 상상해본다. 만약 정자가 복원되어 ‘내소정~임진정~화석정~수월정~몽구정~칠송정’정자를 연결하는 임진강 둘레길이 조성된다면 역사적인 이야기가 스며있는 멋진 장소가 되어, 수많은 방문객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방촌 황희선생의 반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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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은 기암절벽 아래 임진강이 흐르고 강건너 장단반도가 바라다 보이는 문산읍 사목리 190번지 임진강가에 있다.
 반구정(伴鷗亭)은 조선 초 명재상이었던 방촌(厖村) 황희(黃喜,1363∼1452) 선생이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하였다. 
반구정은 사목리 마을에 거주해오던 장수황씨 황희 후손들이 관리해 오다가 6.25 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에 시멘트로 개축을 하고 1975년에는 단청과 축대를 보수하였다. 그 후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개축하였다. 반구정이 원래 있던 자리는 현재 앙지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반구정에서는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바라볼 수 있으며, 갈매기와 벗 삼던 그 시대와 달리 지금은 갈매기 대신 가을이면 쇠기러기, 청둥오리, 노랑부리 저어새 등 철새와 독수리 떼가 날아와 장단반도를 까맣게 수놓고 있다.
 연천에 살던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에는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갈매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30리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율곡 이이선생의 화석정
  



임진강 물결이 굽이쳐 휘돌아 나가는 율곡리 언덕 위에 서면 강 건너 북쪽으로 장단의 백악산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강을 지키고 서 있는 듯한 적벽이 도열해 있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화석정(花石亭) 이 있다.
정자 옆에는 오래된 고목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율곡이이가 여덟 살 때 썼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를 새겨놓은 바위가 그 옆에서 묵묵히 임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화석정은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나기 아주 오래전 1443년(세종 25)에 5대조 할아버지 이명신(李明晨)이 정자를 짓고, 1478년(성종 9) 율곡 선생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몽암(夢菴) 이숙함(李淑諫) 선생이 화석정(花石亭)이라 이름 지었다.  그 후 율곡 선생이 다시 중수하여 독서와 덕을 기르는 곳으로 삼았다.
율곡 선생은 국사 중에도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며 시와 학문을 전했다고 한다. 그 당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화석정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고 하는데 정자 일대에는 노송이 아름답게 우거지고 아래에는 임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낮에는 범선이, 밤에는 고기잡이배들의 불빛이 끊어지지 않는 선경(仙境)이었다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율곡 선생이 중수하였던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간 그 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율곡 선생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 이후방(李厚坊)이 다시 세웠으나 안타깝게도 6·25 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지역 유림(儒林)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였으며,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 사업의 일환에 따라 화석정을 단청하고 주위도 정화하였다.
제3 공화국 시절 복원되었음을 말해 주는 화석정 중앙의 ‘花石亭’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으며, 내부 뒷면에는 율곡 선생이 8세 때 지은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花石亭 (화석정)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숲풀 속 정자에는 가을이 짙고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하늘 닿은 물빛은 더욱 푸르고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마냥 붉어라

          山吐孤輪月 (산토고윤월)                  산 위에는 둥근달 솟아오르고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강물은 바람결에 일렁이는데

          塞鴻何處去 (색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나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날 저문 구름 속에 울음 끊겼네


                         

 <경기 지방의 명승 사적> (1937)에 수록된 '파주 화석정'의 모습을 보면 화석정은 사방이 막혀있고 문이 달려있으며, 추울 때 난방을 할 수 있는 장치까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보아 화석정은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실 또는 학당의 기능을 가지고 숙박도 할 수 있는 구조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사라진 임진강 옛 정자들

내소정(來蘇亭)

임진강 여울이 얕게 휘돌아 흐르는 깎아지른 적벽 위에 조선시대 수많은 문사들의 시(詩)와 유람기에 등장하는 내소정(來蘇亭)이 있었다. 지금은 정자는 사라지고 그 옆으로 깎아지른 절벽 아래 양수장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문산읍 장산로 297-143의 주소를 가진 임진강 양수장옆 변전소 부근 강가의 빈터가 내소정 자리이다. 

 


 이 근처에서 1936년에 탄생하여 오랜 기간 거주해왔던 거창신씨 문중의 신원성씨(파주읍 봉암리. 1936년생)에 의하면 양수장을 짓고 관리사를 지을 때 장산 끝자락을 파내어 그 흙을 내소정터 위에 2미터 이상을 돋우었기 때문에 그 자리가 높아져서 석축이나 주춧돌 등이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그러한 돌유적들이 많이 보이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 중기 이후로 수많은 시와 문장에 나타나는 내소정은 과연 누가 건립했을까. 그동안 전해져오는 이야기로는 내소정이 조선 성종대의 영의정 신승선(愼承善 1436~1502)이 임진강가에 건립한 정자라고 전해져 왔다.
신승선은 연산군의 장인이다. 1487년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嬪)으로 뽑히자  이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거창부원군에 봉해졌다. 부인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딸이다.
 그러나 1984년도 편찬된 『파주군사』에서는 신승선의 5대손 제창군 신득의(愼得義)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창신씨 문중에서도 신득의가 내소정 인근에 99칸 큰 저택을 짓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때 내소정이 건립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옛 사람들의 편지글 등의 기록에 의하면 내소정은 최소한 1910년대 까지는 존립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내소정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인근에 살았던 거창신씨 문중에서도 알 수 없다고 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임진강의 초평도가 물길에 잠겼다고 하니 그 물길에 휩쓸리지 않았나 추측해볼 뿐이다.

임진정(臨津亭)

율곡리 임진나루에서 남쪽으로 임진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파주목읍지』에 의하면 “임진도 남쪽 언덕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중종 때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고(唐皐)라는 중국사람이 풍수를 잘 보는데 임진정에 올라 ‘건너편 산에 있는 묘를 바라보며 ‘저기에 묘를 쓴 사람의 자손 중에 반드시 무사(武士)가 많이 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을 보면 임진나루 부근에 임진정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통 큰 강의 나루터 부근에는 정자가  있었으며 이 정자의 기능은 휴식처로서의 기능 외에 세금을 걷거나 운송료를 받는 회계사무실로 이용되기도 하고 귀빈들의 환송장소, 또는 회의장소로도 이용되었던 경우가 많다. 충청도 금강에 있었던 영춘정도 조세와 관련한 회계와 사무를 관장했었고 빈객을 맞이하기 위한 영빈정을 따로 세워 손님맞이와 전송의 요식(要式)을 치르는 장소였음을 보면 임진나루 근처의 임진정도 이러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수월정(水月亭)
  


화석정에서 상류 쪽으로 가까운 곳에 율곡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부터 현무암 검은 적벽이 장파리까지 이어지는데 화석정에서 강변을 따라 임진강 상류 쪽으로 2킬로미터 쯤 가다보면  ‘강변휴게소’라는  카페가 있다. 수월정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은 강변휴게소 카페에서 화석정 방향으로 약 50미터 부근의 커다란 고목이 있는 자리이다. 고목은 두 그루가 있다가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으며 수령은 정확하지 않지만 상당히 오래 되어 보인다. 그 고목 옆에 군시설물 인듯한 작은 가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자리가 정자가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19세기 초 제작된 ‘광여도’에서 수월정의 위치는 화석정 위에 그려져 있다. 1773년 간행된 이현익의 『정암집』에는 ‘화석정에서 몇 리를 가면 수월정이 있고 거기서부터 적벽이 시작된다.’고 기록되어있다. 
수월정의 주인은 나계(蘿溪) 조사석(趙師錫)이다. 조카인 조태억의 『겸재집』에서 숙부 충헌공이 경오년(1690년) 이후 관직에서 물러 나와 파주의 나계 수월정에서 은거하며 지냈고 이웃에 이기(李基)라는 참봉이 늘 함께 어울려서 시를 짓고 서로 화답하였고 쌍백당 이세화가 이곳 고향에 머물러 살고 있어서 자주 문학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조사석은 숙종의 후궁 희빈장씨와 관련된 인물로 알려졌다. 희빈장씨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남편(장형)이 사망하자 조사석의 첩이 되었고, 그 인연으로 장옥정은 궁에 나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몽구정(夢鷗亭)

 창녕성씨 문중에서 몽구정(夢鷗亭) 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되는 곳은 현 전진대교 아래 두포리에서 내려오는 개울 옆이다. 위 아래로 임진 적벽이 펼쳐져있으며, 멀리 화석정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이다. 

  


 1995년 파주시에서 편찬한 『파주군지』에는 몽구정의 위치가 ‘파평면 파평초등학교 서쪽의 임진강안 석벽 위에 있었다고 하며 두포리의 자연부락인 장포동에 몽구정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자리는 현재 두포리 전진대교 왼쪽 아래 임진강으로 두포천이 합수되는 적벽 위 지점으로  군부대 시설물(철조망) 내에 있는 두포리 475-1번지가 몽구정이 있던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일반인의 출입이 불가한 지역이다. 
이곳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소동파가 유람하던 소선적벽과 비교되었고 장단적벽 중에서도 이 정자가 위치한 파주적벽이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1984년도 편찬된 『파주군사』에는 몽구정이 ‘파평면 장개(長浦) 즉 지금의 두포리에 있다. 문두 성담수(成(聃壽)가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
몽구정은 1882년 까지는 존립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순조 28년(1828)에 연경(燕京)에 다녀온 심전(心田) 박사호(朴思浩)의 연행 기록인 《심전고(心田稿)》에 몽구정에 대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자의 주인인 성담수(成聃壽) 생육신으로 성희의 큰아들이며 사육신 성삼문과는 재종간이다. 계유정난으로 부친 성희가 혹독한 국문을 받고 김해에 안치되었다가 고향에 오지 못하고, 충청도에서 죽는 것을 보고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파주 두포리에서 은거하였다.


칠송정(七松亭)

 칠송정(七松亭)이 문헌에 나타나는 위치는 두 군데가 전해진다. 한 곳은 탄현면 갈현리 일대로 조선시대 백강 이경여와 관련된 곳으로 조선 중기에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옛지도에 표기되지 않아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위치만 『파주 지명유래와 전설』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는 백강 이경여(1585∼1657)가 휴율강 삼도품 부근에 칠송정을 짓고 살면서 자손들을 지도하였다고 하였다.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는  큰아버지 성록의 맏아들 후여(厚與)의 양자로 들어가 이관명과 이건명을 낳았다. 이들의 묘는 탄현면 법흥리와 맥금동에 있다. 이민서와 그의 아들 이관명과 손자 이휘지는 모두 대제학을 역임하여 이 집안은 3대 대제학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4대 명문가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을 주민들은 오두산통일전망대 지형이 거북이 형상을 갖고 있는데 전망대에서 한강 방향으로 거북이의 머리가 고개를 숙이고 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 있고 예전부터 그곳이 정자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성동리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김용기씨(89세)에 의하면 그 자리에 정자가 있었으나 정자가 헐리고 제당이 들어서서 어부들이 어업을 나가기 전에 풍어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 그곳은 군사지역이라 민간인의 출입이 어려운 곳이다.
또 다른 칠송정터는 고려 태조가 왕래했고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했을 때 쉬었던 곳이라는 적성면 장좌리 임진강 적벽 위에 있는 곳이다. 현재 칠송정터는 군사 시설물로 인해서 진입이 어려운 상태이다. 아래로는 절벽이 있고, 물이 빠지면 절벽 아래로 모래턱이 드러난다. 궁예궁터와는 약 4㎞ 떨어져 있다.
『경기지』「파주목읍지」에는 ‘칠송정(七松亭)은 수월정 상류에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파주과 관련된 여러 고지도 즉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나 『여지도」, 19세기 초에 제작된 『광여도』에서 칠송정의 위치는 모두 수월정 상류 파산서원 부근으로 그려져 있다. 

여지도 속 임진강 옛 정자


이밖에 기록 속에 나타나는 임진강의 옛정자들...

○ 한벽정(寒碧亭) - 창녕성씨의 옛 별장
○ 침류정(沈流亭) - 덕진산성 부근 강언덕에 있던 이종성이 지었다는 정자
○ 원사정(遠思亭) - 적성면 구읍리 임진강변으로 추정되며 경유휴가 인목대비 유폐시에 세상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했다고 함
○ 율포정(栗浦亭 ) - 적성면 율포리 율포 앞의 임진강 가에 있었으며, 인조 대 정승 홍서봉(洪瑞鳳)이 세웠다고 한다.
○ 삼호정(三湖亭) - 문산읍 내포리 임진강 변에 위치하였으며, 성염조(成念祖)가 은거하였다고 한다.

취재 : 권효숙 싱싱뉴스 시민기자

작성일 : 2015-03-10 조회수 : 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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