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대유학자이며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문묘에 배향된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은 1535년 을미년에 서울 순화방(順和坊. 현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나 5살이 되던 해인 중종 34년(1539) 파산(坡山)의 우계(牛溪), 즉 지금의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로 이사하여 자랐다. 성혼의 호인 우계도 그가 자란 지명을 따서 ‘우계’라고 하였다. 성혼의 가족이 파주지역에 정착을 시작한 배경은 바로 외가인 파평 윤씨 윤사원(尹士元) 집안과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성리학자 성수침(成守琛,1493~1564)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했다. 그는 아들 성혼은 물론 많은 석학들을 길러 배출했다.
성혼은 아버지의 학우였던 휴암 백인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명종 9년(1554)에는 같은 파주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의 벗이 됐다. 또한 교하 산남리에 살았던 구봉 송익필과도 평생을 교류하고, 이이와 함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성혼은 명종 5년(1551) 초시에 급제했으나 더 이상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 선조 초부터 여러 관직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이의 권유에 의해 벼슬길에 나아가 선조 27년(1594)에는 좌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돼 고향인 파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다가 파산사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계 성혼 사당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선조 35년(1602) 기축옥사와 관련돼 삭탈 관직됐다가, 인조 11년(1633)에 복관됐으며, 파주에 있는 파산서원(파평면 파산서원길 24-40) 등에 제향됐다. 묘는 파주읍 향양리에 아버지 성수침의 묘와 위아래로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됐다. 우계 성혼의 후손들은 파평면 두포리, 율곡2리 빙곡동마을 등에서 뿌리를 이어 내려오고 있는데 빙곡동마을에는 현재 후손 1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성혼 묘
성혼 신도비
을미년 파주, 조선왕조실록에 9번 등장!
● 태종 15년(1415) 7월 7일 요언을 지은 교하 사람 김문영의 죄를 한 등 감하다 |
취 재: 권효숙 싱싱뉴스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