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2일 (목)
역사와 전통
생사를 함께한 세벗
율곡, 우계 그리고 구봉


지난 10월 11일 지지향에서 '구봉 송익필과 생사를 함께한 벗을 찾아서'란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여기서 벗은 율곡(栗谷 : 이이 1536~1584 자(字)는 숙헌), 우계(牛溪 : 성혼 1535~1598 자(字)는 호원), 구봉(龜峰 : 송익필 1534~1599 자(字)는 운장)을 말한다. 구봉이 자신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에서 율곡과 우계와 주고받았던 편지 98편을 모아서 <삼현수간>을 엮었다. 이를 장주식 선생이 현대식으로 쉽게 풀어서 소설적 상상과 곁들여 세상에 내놓았다. 또 율곡이나 우계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구봉에 대한 연구는 김창경 선생이 내놓는다. 두 분의 강연을 들어본다.



≫ 장주식 선생이 본 율곡, 우계, 구봉의 묘지  

먼저 장주식 선생은 세 분을 연구하기 위해 세 분의 묘지를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

“율곡 선생은 평생 가족과 함께 살고 싶었던 바람이 죽어서 이루어진 듯합니다. 부모님, 아들, 손자, 누님네 가족까지 3개의 권역으로 나눠져 있는 큰 묘역입니다. 율곡의 묘소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아들의 벼슬이 부모보다 더 높게 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인 조선의 천재 성리학자가 쉬는 곳은 약간 습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계 선생은 평생을 병약한 몸으로 살았던 대학자였지요. 고통스런 몸으로 평생공부를 하던 분인데 배려하는 마음, 넉넉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무덤은 탁 틔었고 시원한 느낌을 주었어요. 우계도 살아서 부친보다 벼슬이 높아서 무덤의 위치가 높습니다.
 
구봉 선생은 아버지의 업보로 평생을 힘들게 살다가 죽기 3년 전에 당진에서 살았어요. 거기 묘도 있는데 마지막으로 누워 계신 곳은 힘겨웠던 삶에 보상이라도 받듯 편안하고 따뜻하게 보였습니다.”



≫ 세벗의 다른 성격, 닮은 학문사랑
 
장 선생은 세 분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다. 율곡은 강직한 성품이며, 효성이 지극했다. 서모(庶母)가 성격이 괄괄했던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었는데, 친구인 우계가 놀러왔을 때 서모에게 절을 시켰다. 율곡은 적서차별의 부당함을 스스로 알고, 깨뜨렸던 것으로 보인다. 우계는 병약하게 살아서 그런지 약사일 정도로 약에 대해 해박했다. 그러면서 검소했고, 천생 선비일 수밖에 없던 사람이다. 그는 벼슬에 대해서는 병적으로 피하며 살면서 사직상소의 달인이라고 표현했다. 구봉은 선이 굵고 곧은 사람이다. 예학의 달인이며, 대문장가로 시를 많이 남겼다. 교육자로서도 탁월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그중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특히 유명하다. 세분의 대학자들도 시를 썼는데 구봉이 가장 많은 730여 편이 이른다. 우계는 50편, 율곡은 20편정도 전한다. 작품 수는 적지만 율곡의 시가 가장 많이 알려졌다.

장 선생은 <삼현수간>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첫째, <삼현수간> 안에는  학문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16세기의 음식 나누기, 소식 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둘째, 서간을 통한 학문의 성장이다. 세 사람의 뛰어난 학자들의 교류는 그야말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본보기다. 셋째, 98통에 이른 손 편지, 특히 <삼현수간>은 보물 1415호(2004. 8. 31)가 되었다.”

≫ 김창경 선생이 본 구봉이 가려진 이유
 
다음 강연은 김창경(54, 충남대 강사)선생이다. 그의 목소리는 컸고, 울림이 있었다. 그는 구봉 송익필 선생에 대한 연구로 박사 논문을 받았다. 오늘은 일반 청강생들에게 파주의 위대한 문장가를 널리 알려주고 있다.



“구봉 선생은 8대 문장가로 알려질 정도로 대단한 학자였습니다. 율곡이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구봉에게 가서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구봉이 가려진 이유는 첫째, 천민이란 신분적 제약 때문입니다. 둘째, 부친의 허물, 당쟁의 희생이 되었습니다. 셋째, 뛰어난 학문, 강직한 성품에 대한 질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넷째, 제자들이 율곡, 우계에게만 사승(師承)을 두었습니다. 다섯째, <구봉선생문집>이 구봉 사후 163년 만에 세상에 나왔으니 너무 늦게 빛을 보았던 것입니다.”

≫ 구봉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
  
그가 전하는 구봉 선생의 일대기를 보면, 부친 송사련이 살아있을 때까지 넉넉한 삶을 살았다. 송사련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천민이었기 때문에 그도 천민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송사련은 정삼품 첨지중추부사 절충장군에 올라서 양역(良役)으로 속량되었다. 송사련이 ‘신사무옥’을 일으키는 고변자가 되면서 구봉과 형제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삶을 살게 된다.

구봉이 25세부터 과거 응시를 금지 당한다. 그의 나이 33세 훈구세력이 몰락하고, 51세에는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던 율곡마저 죽는다. 53세에 이르러서는 부친이 삭탈관직 된다. 56세에는 정여립 사건이 발생하는데 또 한 번의 위기가 온다. 구봉과 동생이 관련되었다는 누명을 받게 되는데, 그는 정철의 도움으로 전라도 광주로 피신하지만 아우 송한필과 다시 구속된다. 57세에 풀리지만, 58세에 정철의 왕세자 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 간다. 59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 해 12월 정철이 죽고, 그가 61세 때에 둘째형 송부필과 아우 송한필이 죽는다. 63세가 되던 해에 면천 마양촌의 첨추 김진려의 집에서 기거하게 된다. 65세에 우계마저 떠나게 된다. 66세에 아들 취대에게 율곡과 우계와 주고받은 편지글 <현승편>을 엮게 하고, 그는 8월에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한다.



구봉 선생이 나이 들어서까지 고난을 당했던 것은 당시 정권의 괘씸죄라고 볼 수 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득세에서 나타난 권력자들이 고결한 인품과 뛰어난 유학자에 대한 질시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위대한 학자에게 따랐던 불우함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구봉이 늦게나마 알려지게 된 것에 대해 그나마 후손들에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었다. 잘 몰랐던 역사의 위대한 인물에 대해서 청강생들의 관심도 많았다.   
 
특히 구봉 선생의 15대손이신 송영석(77, 일산)옹은 시종일관 곧은 선비의 자세로 조상의 연구를 듣고 있었다. 송옹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구봉 선생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아버님을 모시고 왔다는 아들은 세세히 알지 못했던 조상에 대해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전한다. 자신을 송씨라고 밝힌 여학생(파주거주, 사회복지학)은 “저의 직계 조상인줄 알았다. 아니라도 오늘 좋은 공부를 하고 간다”고 귀띔한다.

고전이 고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세대를 이어오는 조상의 지혜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주의 성리학 세학자인 율곡, 우곡, 구봉은 서로에게 비판과 충고, 그리고 격려와 존경을 보냈던 16세기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었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현들의 삶과 우정은 인간관계와 청소년 교육의 사표를 지닌다.

취 재: 한윤주 싱싱뉴스 시민기자

작성일 : 2014-10-20 조회수 : 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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