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4일 (월)
역사와 전통
주인 바뀐 진동면 서곡리 고려벽화묘

2004년 12월 대법원은 분묘기지권에 대한 청주한씨문열공파종중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이 분묘의 피장자는 청주한씨 한상질이 아닌 안동권씨 권준이며 안동권씨창화공파 종손 권혁홍에게 분묘기지권이 있다고 최종판결하여, 3백 여 년 간 청주한씨문열공파에서 관리 수호해오던 무덤의 주인을 하루아침에 바꾸어버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991년 1월 민통선 지역인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산 112번지의 한상질 묘 및 그 부인의 묘가 도굴을 당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한상질(韓尙質)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공양왕 때 형조판서를 거쳐 우부대언, 우상시,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예문관학사로서 진문사(秦聞使)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 받아 돌아온 인물이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문열공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당시 도굴된 흔적을 발견한 청주한씨문열공파종중은 묘의 지하 내벽부분에 그림으로 보이는 채색(彩色)들이 보이자 국립중앙박물관에 제보를 하게 되었고, 곧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조사에서 시신을 안치하도록 조성한 석곽의 동ㆍ서ㆍ북 3벽 내면과 문비석(門扉石) 내면에 각각 12지신 형상의 모자를 쓴 인물상이 그려져 있고 천정석 중앙에 별자리를 그린 성진도(星辰圖)가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발굴조사 중 그 분묘 남서쪽 모퉁이로부터 남쪽으로 80~130㎝ 떨어진 지점의 땅 속에서 네 조각으로 분리된 묘지석(墓誌石)이 나오고, 분묘 내부에서 묘지석의 석편(石片)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석편을 합쳐보니 하나의 묘지석으로 복원되었다. 발굴 작업 당시 현장에 있었던 청주한씨 종인들과 묘지기는 출토된 그 묘지석이 1980년경 분묘 내부 입구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확인을 해 주었다.





묘지석에는 ‘증시창화권공묘명(贈諡昌和權公墓銘)’이란 제액 아래 ‘유원고려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길창부원군권공묘지명 병서’ (有元高麗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吉昌府院君權公墓誌銘 幷序)라고 기재되어 있고, 권준의 생전 행적과 증조, 조, 부 및 자녀, 손(孫)에 이르기까지의 가보(家譜,), 그리고 장지(葬地)를 생전에 선정하여 분묘를 조성한 경과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권준이 사망한 해는 1352년 7월 14일로 그의 나이 72세 때이다. 이 묘지명은 당대 대제학이던 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것이다.


또한 분묘 내부에서 청자편, 동전 등이 발견되었는데 제조시기가 권준이 살았던 시기와  일치하고 내부 벽화의 특징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과 결정적으로 묘지석의 정확한 기록에 의하여 대법원에서는 이 묘가 한상질의 묘가 아닌 권준의 분묘이고, 권준의 후손은 이 분묘에 관한 분묘기지권을 취득하였다고 판결하였다.


그렇다면 이 분묘의 주인공 권준의 묘가 어떤 경위로 청주한씨 문중에서 관리해오게 되었을까? 우선 권준이 누구인가를 알아보자.


권준은 안향의 뛰어난 제자로서 일찍 과거에 급제해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의 다섯 왕을 섬기고 정1품 삼중대광의 벼슬까지 올랐던 권보(權溥)의 큰아들이다. 권보는 당대 최고 학자 이제현과 왕자 두 명을 사위로 두었는데. 아들 다섯과 사위 셋, 그리고 본인까지 모두 9명이 봉군(군의 작호를 받는 것)되어 9봉군 집안으로 최고의 가문이라 일컬어졌다. 


권준은 과거에 급제하여 충선왕을 중국 연경에서 만나 대언(代言)에 발탁되고, 그 후 밀직부사, 지밀직사사에 올랐다.  그 당시  충숙왕은 원나라 조정과의 여러 외교업무를 권준에게 맡겨 자주 원나라를 왕래했다. 조적(曺頔) 등이 충혜왕을 모함하여 심양왕(瀋陽王) 고(暠) 에게 왕위를 넘기도록 책동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심왕에게 붙었으나 권준만은 의리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


변이 평정되자 첨의찬성사에 임명되고, 또 조적이 패하자 충혜왕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봉하고 권준의 집에 부원군의 청사를 열어 관원을 두게 하였다. 충목왕이 돌아가자 권준은 기로대신(耆老大臣)들과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공민왕이 즉위하도록 노력했다.





권준의 글씨는 명문으로 일컬어지고 외손녀가 충혜왕 때 화비(和妃)로 책봉되어 권세와 부귀를 크게 누렸다. 충숙왕이 권준을 총애하여 문성공 안향의 옛집을 매입해 하사하여 강학처로 삼게 하기도 하고 금잔(金盞)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가속들이 죄를 지어도 순군(巡軍)이 감히 처벌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충숙왕이 권준의 집에 와 머물기도 하였는데 그 집의 아름다움이 국왕으로서도 당할 수 없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자택의 호화로움이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세도를 믿고 뇌물을 받아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그 풍요로움으로 베풀기도 잘해 30여 년 동안 10여 명의 승려에게 보시를 하여 절을 운영하게 하기도 했다. 한림학사를 지냈던 만큼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아버지 보의 지시로 이제현과 함께 『효행록』을 지었다.


권준에게는 두 아들 형(衡)과 적(適)이 있었다. 맏아들 형(衡)에게는 용(鏞).현.호.균.주 다섯 아들이 있었고 장남 용(鏞)은 할아버지 권준의 묘지명의 글씨를 썼으며 용의 셋째 아들 진(瑨)이 공민왕의 자제위였다.


1374년에 공민왕이 자기를 시위하던 자제위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은 늦게까지 아들이 없자 후사를 얻기 위하여 자제위 소속 청년들로 하여금 여러 비빈(妃嬪)들과 사통(私通)시켜 아들을 낳게 하여 후사로 삼기를 원하였는데, 홍륜이 익비(益妃:공민왕의 셋째부인)와 관계하여 임신하게 되자 왕은 기뻐하며,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고 하자, 이를 두려워한 홍륜이 환관 최만생(崔萬生)과 모의하여 왕을 시해하였다.” 고 기록되어있다.


물론 이 기록의 내용은 진실의 전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공민왕이 당시 세력을 가진 정적으로부터 시해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당시 명나라와 북원은 반원정책을 펼친 공민왕을 북원파인 이인임이 시해했다고 주목했다. 명나라 사서인 <明史>에는 “홍무 7년  (중략) 이 해에 전(공민왕)이 권신 이인인(이인임의 오기)에게 시해되었다.”라고 적혀있다는 사실을 밝힌 혹자도 있다. 아무튼 그 자제위 5인은 홍륜. 한안. 홍관. 노선. 권진(權瑨)으로 모두 처형되고, 자제위는 폐지되었다.


이 사건으로 권준의 증손자 권진이 처형되고 그의 아버지 권용(權鏞)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우왕에게 살해된다. 권준의 둘째 아들 권적(權適)도 관직을 내놓고 흔적을 숨기고 살다가 여생을 마친다. 이 때 할아버지 권준의 묘를 돌볼 수 없게 되자 외손인 청주한씨 집안에서 이 집안의 묘를 관리하게 된다.


권적(權適)의 딸이 당대 대문호 한수(韓脩)에게 시집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영의정을 역임한 한상경과 조선국호를 받아온 한상질, 판윤을 지낸 한상환이다. 조선조 세조즉위의 일등공신인 압구정 한명회가 한상질의 아들이다. 즉, 권준은 한상질의 외증조부가 되는 것이다.


청주한씨 집안에서도 한안(韓安)이 자제위로 있어 참형을 당하고 그 아버지 한방신(韓方 信)도 귀양 갔다가 살해당한 상황이라 서로 같은 처지에 있었다. 당대에 문재(文才)가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기고 명필로 이름났으며 밀직제학과 판후덕부사 등의 관직에 있던 한수는 그 역시 공민왕 시해에 관여한 한안(韓安)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시 유배되었으나 곧 돌아온다. 그 후 피화로 몰락한 처가의 제사를 잇고 처조부 권준과 처증조부 권보가 살며 강학소로 사용하던 송도의 사원(士園)에서 세거하면서 그 학통도 계승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권준의 묘는 청주한씨 집안에서 수호관리 하게 되었는데 권준 집안은 화를 입은 상황이라 묘비도 감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오랜 동안 묘비 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청주한씨문중은 한상질의 부장묘로 여기고 관리해왔던 것이다.


그럼 한상질의 묘는 어디에 있을까? 권준의 직계 후손으로서 이 소송건의 주역인 권혁윤(파주 법원리)씨에 의하면 권준의 묘 바로 위에 쌍분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분묘가 한상질의 묘라고 하였다.


오래전부터 그 분묘 앞에 한상질 묘비가 있었고 바로 아래 권준 묘는 한상질의 부장품을 묻은 부장묘라고 그동안 청주한씨문중에서 불러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도굴을 당한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이 일련의 사건이 발생되었던 것이다. 외증조부의 묘를 관리해오던 한상질이 사망하자 그의 묘를 외증조부 묘 위쪽으로 가깝게 써서 외증조부 묘역관리에 소홀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동안 묘제를 지낼 때 한상질의 묘와 권준의 묘가 너무 가깝게 있어서 권준의 묘 앞에서만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외증손이 외증조할아버지의 묘를 수호해 오는 것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위가 장인 묘를 수호 관리하는 일은 비일비재 하였다. 충분히 외손봉사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단지 묘의 주인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가 묘의 주인 사후 600여 년이 지난 후 이제야 비로소 주인이 밝혀진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묘지석이었던 것이다. 


   취재: 권효숙 싱싱뉴스 시민기자

작성일 : 2013-07-23 조회수 : 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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