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8일 (금)
소통과 나눔
인생은 재밌다
지난해 10월 말 37년간 일했던 조선일보를 정년퇴임했다. 언론일선을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문화부 기자로 일하며 겪은 소회를 엮어「문화부 기자는 재밌다」는 책을 냈다. 유치한 제목일 수 있으나 돌이켜 봐도 재미있고 행복했다. 스물셋에 신문기자가 되어 회갑을 맞을 때까지 문화예술분야의 수많은 사람을 만나 마음껏 취재하고 원 없이 썼다.
문화부 기자를 하면서 연극, 영화, 방송, 미술 분야를 20년 넘게 취재했다. 문화담당 논설위원으로 10년을 일했으니 평생을 문화부 기자로 일관한 셈이다. 중고교 시절 문예반에서 교지를 만들고 대학 때는 방송국에서 프로듀서를 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좋아했던 일을 직업으로 삼아 평생 했다는 것은 분에 겨운 행운이고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돌이켜 봐도 재미있고 행복했다.
문화부기자를 하며 재미있고 보람된 순간이 많았다. 88서울올림픽 때는 물 만난 고기처럼 문화축전 현장을 누볐고 세계 정상의 공연과 거장들을 접할 수 있었다. 한국이 4강 신화의 기적을 이룬 월드컵 때는 예상 사설마다 적중하는 스릴과 황홀함을 맛보았다. 국전제도에 제동을 건 일이라든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을 단독 인터뷰해‘예술은 고등사기’라는 제목을 뽑아낸 것도 기자 생활의 보람이었다.
킬링필드의 현장 캄보디아, 페레스트로이카의 소련을 현장 취재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미자, 조용필, 김기창, 장우성, 이해랑, 김동원 등 당대의 예인들과의 교유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TV주평을 애독해준 팬들의 성원도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다.
문화부 기자는 재밌다고 했지만 버거운 사건, 부끄러운 일도 많았다. 독자와 취재원들에게 지탄도 받았고 욕설도 들었다. 어느 방송작가는 악역에 필자의 이름을 등장시키는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취재원의 밥줄만은 끊지 않겠다고 했으나 예술가의 붓을 꺾게 하고 은퇴 선언까지 시킨 일도 있다. 어쭙잖은 평을 한다며 펜 끝으로 상대에게 아픔을 준 사례도 적지 않았다. ‘확인 또 확인’이라는 기사의 철칙을 지키지 않아 36억원 손배 소송에 민 형사 제소까지 당해 마음고생도 했다.
후회도 남는다. 기자시절 취재원들과 독자들에게 겸손하지 못하고 따뜻하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린다. 외국어에 정진하고 독서량을 풍부하게 했더라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크다. 이제 겨우 세상을 알 것 같은데 정년이 되어 언론을 떠났다. 퇴임 전날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문화예술계 원로 중진들이 많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 필자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 앞에서 정년과 퇴임을 얘기한다는 것이 쑥스러웠으나 선배들은 위로보다 축하를 해주었다. 문화부 기자의 경험을 살려 문화예술계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라는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기자 시절에는 대과없이 물러난다는 것이 상투적으로 느껴졌는데 막상 내가 그 처지가 되고 보니 허물없이 물러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절감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이고 모든 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독자와 취재원, 그리고 조선일보라는 울타리가 있었기에 정중헌이라는 필명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고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쓰다보니 자랑처럼 돼버렸으나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의 인생이 재미있는가, 행복했는가,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향기를 주는 삶을 살았냐 이다. 필자가 책 제목에 감히 재밌다는 표현을 쓴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하는 것이 쉽지 않고, 그것이 문화 예술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40년 세월 속에 참 많은 것이 변했다. 필자가 기자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볼펜도 복사기도 없었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 이면지에 기사를 썼고 물에 젖은 대장에 활자를 찍어 교정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신문사에 종이가 없어졌다. 모든 공정이 컴퓨터로 이뤄지고 있다. 한국전쟁을 겪고 4.19와 5.16을 체험한 필자에게 워드프로세서로의 전환은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 바다에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사이버 세상에서 이미지가 사회를 움직인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달라지고 지식과 첨단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세상을 바꾸고 있다. 그런데 당신의 삶은 재미있는가, 행복한가.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오히려 군중속의 고독, 인간관계의 단절만이 가속화될 뿐이다. 이런 삭막한 시대에 여유와 활력을 줄 수 있는 것이 문화이고 예술이다. 문화가 만드는 신나는 파장과 문화의 숲에서 뿜어내는 상쾌한 공기가 필요한 시대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평균수명이 길어졌고 여가시간이 늘어났다. 밥만 먹고 TV나 보며 한 세상을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따분하다. 문화예술을 가까이 하지 않고는 정서가 메마르고 삶 자체가 삭막해 진다. 문화가 국가 경쟁력이 되었고 문화산업이 부의 척도가 되었다. 문화부 기자를 한 필자가 재밌다는 화두를 던진 것은 문화의 비중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생존보다 삶을 얼마나 재미있게 윤기 있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의 향기, 예술의 향기를 맡지 않으면 삶 자체가 무미건조해진다. 문화를 감상하고 직접 체험하기를 권하고 싶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둥지를 튼 필자도 문화부기자로 체험한 재미를 살려 예술의 향기와 사람의 향기를 전파하는 작은 일꾼이 되고 싶다.

글 / 정중헌(서울예술대 교수·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작성일 : 2007-02-7 조회수 : 8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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