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9일 (수)
많이본 기사
人 & In
조선후기의 청백리 이세화(李世華) -
- 막걸리를 즐겨 마신 청백리

이세화(1630년 인조8 ~ 1701년 숙종 27)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부평(富平)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며, 호는 쌍백당(雙栢堂)이다. 효종 3년(1652)에 사마시를 거쳐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관직에 들어와 숙종 연간에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황해·평안·전라·경상도의 관찰사를 두루 지냈다. 숙종 10년(1684)에는 연행부사(燕行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화선생묘 비문
이화선생묘 안내판

선생의 묘역은 문산읍 선유리에 있다. 선유리 시내에서 법원읍으로 넘어가는 364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가 선유마을 회관을 지나자마자 외편으로 꺾어져 화석정 방향으로 올라간다. 입구에서 600미터 쯤 올라가면 왼편에 <이세화선생묘 0.9㎞>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이세화선생 묘 가는 길
이세화선생 묘

이세화 선생은 당태종에게 직언했던 신하 위징처럼 강직한 청백리였기에 오늘날 그 존재가 더욱 그립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임금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용렬한 군주는 이를 싫어하지만 성군은 충신의 직언을 아름답게 여겨 태평성대를 열어간다.

1689년 인현왕후의 폐위 소식을 듣고 그 부당함을 주장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정주(定州)로 유배되었다가 선영이 있는 파주(坡州)의 파산(坡山)으로 돌아온다. 그 이후 1694년에 있은 갑술환국으로 재 등용되어 인현왕후복위도감제조(仁顯王后復位都監提調)로서 인현왕후 복위의 실무를 담당했다.

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숙종조에 장마와 가뭄으로 인한 백성들의 살림이 궁핍해 지자 상소를 올려 임금이 몸소 먼저 검소한 것으로 아랫사람들을 인도하고, 안으로는 궁중의 사치를 금하고 각사(各司)허례허식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나아가 호포법 시행과 관련하여 군병(軍兵)·노비(奴婢)가 부담하는 신역(身役)에 따른 부담이 큰데 흉년과 기근 때에는 형편에 맞게 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조판서가 된 이후 함경도에 흉년을 들자 이때도 역시 조세를 감면과 궁가의 절수에 대해서도 상소를 이어갔다. 마침내 그는 각 조의 판서, 좌참찬 등을 거치며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뽑혔다.

백주당(白酒堂)
이세화는 막걸리를 좋아해서 막걸리를 예찬하는 시도 지었다.

이세화는 막걸리를 좋아해서 막걸리를 예찬하는 시도 지었다. 그의 막걸리 사랑이 어떠했느냐 하면 문산 칠정리(선유리)의 집을 막걸리를 뜻하는 백주당(白酒堂)이라 짓고 집 앞에는 쌍백나무를 심어놓고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도연명이 막걸리에 국화꽃을 띄워 마신 고사가 생각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려운 정치현실 앞에서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며 정의를 위해 치열하게 살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세파의 시름을 달래 줄 한잔 막걸리는 필요했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막걸리는 허기를 면하고 값이 싸서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었다. 청백리 이세화에게 막걸리는 반가운 존재였을 것이다.

白髮之白兮 白酒之白兮

爾能適我?兮

玉盤珍羞 難辦千金價兮

瓦樽缶飮 正宜茅茨下兮

以吾之白得爾之白

白酒兮白酒

庶幾使虛室而長白

 

백발의 흰 빛이여 막걸리의 흰 빛이여

너는 내 마음에 꼭 드는 구나

옥쟁반의 진수성찬은 천금의 값이라 장만 못하나

막사발에 마시는 술 초가집에 마땅하지

내 흰 빛과 너의 흰 빛이 어울리니

막걸리야 막걸리야

빈 방에 늘 흰 빛이 가득 하여라

 

- 이세화/ 백주당기(白酒堂記)/ 쌍백당집(雙栢堂集)

이세화선생묘역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선유리 산89-4

 

 

           

취재 : 김용원 시민기자

작성일 : 2018-4-3 조회수 : 362
  • 목록으로
  • 프린트
  • 트위터
  • 페이스북

컨텐츠 만족도 조사

홈페이지내의 서비스향상을 위한 시민 여러분들의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