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0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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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1)
- 미리 가보는 의주로 제2구간

길을 떠나며 생각한다. 무엇을 볼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무작정 떠난 길에서도 우리는 풍경과 사색을 마주한다. 언제나 기대 이상의 기쁨을 안겨주는 길의 매력, 거기에 지적 경험이 곁들여질 때 떠남의 의미는 배가 된다.


파주시는 경기 옛길 의주로의 의미를 되새기고 예술, 강의, 걷기 등의 문화체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테마 탐방 도보프로그램’을 마련한다. 행사에 앞서 조선시대 제1대로인 의주로는 어떤 길이며 그 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지 알아보자.

의주로는 조선시대 제1대로로 한양에서 의주를 잇는 총 연장 1,080리의 교통 통신로이다.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며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군사·외교·문화 통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조선과 중국을 왕래한 사신들도 이 길을 이용했다. 한양에서 의주까지는 걸어서 15일, 북경까지는 40~60여 일이 소요된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에 25개의 관(館:숙박시설)과 45개의 참(站)이 설치돼 이동의 편의를 제공했다. 현재의 국도 1번길(통일로)과는 벽제 삼거리 부근에서 고양동 방향으로 갈라진다.

경기 옛길’은 의주로 전체 구간 중 고양(삼송역)에서 파주(임진각)에 이르는 56.5㎞의 거리를 5구간으로 나누어 조성한 역사문화탐방로이다. 오늘 소개할 곳은 벽제관지에서 용미3리에 이르는 제2구간으로 벽제관, 혜음령, 혜음원지, 용미리 진대마을 순으로 여정을 안내한다.

벽제관 옛사진

벽제관 옛사진

별제관지

별제관지

벽제관(사적 제144호.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은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머물던 공용 숙박시설이다.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숙박을 하고 의복을 갖추어 입은 후 한양으로 들어갔다. 고양향교와 함께 현재의 위치에 자리 한 것은 1625년(인조3)으로 건물은 모두 6·25전쟁 때 소실되어 빈 터만 남아있다.

혜음령

혜음령

용미리에서 바라본 혜음령

용미리에서 바라본 혜음령

벽제관을 거쳐 혜음령 고개에 오른다. 한양에서 출발한 이들은 혜음령 고개에 올라 멀리 바라다 보이는 용미리 마애이불을 보며 거리와 방향을 가늠했다. 혜음령은 고양과 파주의 경계 지점으로 장길산과 임꺽정 등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 물자가 드나들던 주요 길목이나 산이 깊고 험해 탈취하고 은신하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고려 예종 임금은 ‘초목이 울창하고 호랑이와 도적들이 들끓어 행인 보호와 편의 제공을 위해’ 혜음령 고개 아래에 혜음원을 짓게 했다. ‘‘그 후 깊은 숲 속이 깨끗한 집이 되었고, 무섭던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다.’라고 전해온다. 고개 아래 터널이 뚫려 있으니 혜음령에 오르려거든 터널로 진입하지 말고 옆길을 따라 올라야 한다.

혜음원

혜음원

혜음원 안내판

혜음원 안내판

파주혜음원지(坡州惠蔭院址: 사적 제464호)는 고려 예종 17년(1122) 건립된 고려시대의 공용 숙박시설 ‘혜음원’이 있던 곳이다. ‘동문선’과 ‘혜음사 신창기’에 남경(서울)과 개성 간을 오가는 관료 및 백성에게 안전과 편의를 제공하고 국왕의 행차 시 머물 별궁의 필요에 따랐던 건립 내용이 전해온다.
온통 산으로 덮여있던 혜음원의 위치가 파악된 것은 ‘우리 동네에 무언가 있었던 것 같다’라는 주민의 제보에 의해서다. 1998년 지표 조사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고, 2001년부터 2004년 까지 1~4차 발굴을 완료, 2005년 6월에 사적 제464호로 지정됐다.
혜음원은 남한 일대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려 최대의 유적지이다. 10차 발굴이 완료된 현재까지 일반인이 머물던 객사에서부터 왕이 머물던 별원까지 총 11단의 건물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12세기에 제작된 최고 품질의 고려청자와 상감 기법으로 장식된 청자판, 금속(주석)으로 구연의 테를 두른 청자 등이 대량 발굴되었다.

용미리 진대

용미리 진대

용미3리

용미3리


혜음원이 있는 마을은 용미4리로 예로부터 이 마을을 ‘진지마을’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단숨에 평양을 탈환한 이여송은 충천한 사기로 무리하게 일본군과 싸우다 이곳에서 크게 패하였다. 도처에 널린 죽음을 위로하고자 마을사람들은 진대(솟대)를 세우고 굿을 해주었다. 용미리 진대굿은 지금까지 이어오는 대표적 마을굿으로 매년 10월 3일에 용미4리에서 진행된다. 다양한 볼거리와 이야기가 있는 의주로 이야기, 2코스에 이어 3~5코스까지의 역사 문화유적지와 행사 관련 소개는 다음 호에 이어진다.


취재 : 김순자 시민기자

작성일 : 2018-3-6 조회수 : 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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