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2일 (목)
역사와 전통
수길원에 깃든 형제애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극상림 숲길을 걷다보면 수길원 안내판이 불쑥 나타난다. 눈에 잘 띄지도 않거니와 혹시 발길을 멈추더라도, 대개는 철망 너머로 힐끗 눈길을 주었다가 거둬들이게 마련이다. 드라마 ‘동이’로 유명해진 숙빈최씨의 소령원이 코앞인 탓이다.

파주 수길원 안내판

[파주 수길원 안내판]

자신의 제향마저 소령원에서 물림상을 넘겨받을 정도로, 존재감 없는 수길원이다. 하지만, 거기라고 궁금한 사연이 없으랴. 출입허가를 받고 날을 잡아 철망을 열게 되었다.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과 현세를 구분한다는 금천교는, 소령원과 수길원 사이 계곡의 도랑에 걸쳐있고, 완만한 경사로가 구불구불 솔숲을 가르며 뻗어갔다. 한참 만에 다다른 홍살문 앞, 원침은 정면을 살짝 빗긴 11시 방향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원침

[홍살문에서 바라본 원침]

정빈이씨가 입궁한 1701년(숙종 27)에는 참담한 사건이 잇따랐다. 희빈장씨에게 밀려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가까스로 복위되었으나 환후를 떨쳐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궁녀 신분에서 왕비가 되었던 희빈장씨는 빈으로 강등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그쪽 줄을 대고 권력을 휘두르던 남인들은 목숨을 잃거나 귀양길에 올랐다. 그 다음에는 희빈장씨의 아들인 세자를 폐해야 한다, 그냥 두어야 한다, 노론과 소론이 새로운 싸움을 벌였다.

그 와중에 생각시로 뽑혀 동궁에 배치된 정빈이씨는 8세였고, 훗날 사도세자의 어머니가 된 영빈이씨는 6세였다. 당시 동궁의 주인은 희빈장씨의 아들인 세자 이윤(경종, 14세)이었으며, 숙빈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은 정빈이씨와 동갑인 8세였다.

향나무 두 그루

[향나무 두 그루]

흙을 돋워놓은 정자각터와 수복방터 위쪽 비각 자리에 늙은 향나무 두 그루가 잦바듬하게 버텨 서있다. 무덤 앞에 향나무를 심어 제향 때 현지조달을 하자는 게 영조의 취향이었던지, 소령원 비각 앞에도 오래 묵은 향나무가 있었다. 원침은 서남향으로 앉았고, 봉분 뒤편에는 담장을 둘렀다. 정면에는 비석, 혼유석, 장명등이 한 줄로 배치되었고 망주석, 문인석이 좌우로 갈라섰는데, 파편 맞아 패인 혼유석의 상처가 가슴을 긋는다. 처음에는 세제 연잉군 소실의 묘로 병풍석, 난간석, 무인석, 석양, 석호를 생략하여 단출하게 조성했다가, 훗날 왕(추존왕 진종)의 사친 무덤에 걸맞게 정자각, 수복방, 비각 등을 세웠다지만 지금은 없다.

원침

[원침]

뒤에서 바라본 전경

[뒤에서 바라본 전경]

혼유석과 장명등

[혼유석과 장명등]

연잉군에게 1716년(숙종 42)부터 1722년까지 몇 년은, 황망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그해 동궁의 궁녀 정빈이씨를 소실로 맞았으나 이듬해 딸(화억옹주)을 낳고 참척을 겪었다. 1718년에는 어머니 숙빈최씨의 상을 당하여 소령묘를 조성했으며, 다음해에는 정빈이씨가 아들 이성경(효장세자)을 낳았다.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갈수록 극렬해지던 1720년 6월, 아버지 숙종이 타계하고 형 경종이 즉위했다. 1721년 10월 3일에는 노론의 강력한 후원으로 세제에 책봉되었다. 관례에 따라 소훈(종5품)으로 책봉된 정빈이씨는, 한 달 뒤인 11월 16일 갑자기 죽었다. 한창 젊은 28세였다. 세제 연잉군은 사흘 뒤인 11월 19일, 직접 ‘소훈이씨제문’을 지어 참담함을 표했다.

<그대가 뽑혀 들어왔을 때에 나 또한 나이가 어렸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처신하는 바가 규범과 법도가 있었으니 진실로 내가 남몰래 탄복한 바이다.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어머니들(숙빈최씨, 희빈장씨)은 목숨을 다투던 원수지간이었으나, 연잉군은 6세 위인 형(세자, 경종)을 진심으로 믿고 따랐다. 거리낌 없이 수시로 동궁을 드나들면서 동갑내기 궁녀 정빈이씨를 애틋하게 여겼다.

<이미 그 작위(소훈)를 받고 집에 자녀가 있어서는 결코 그대로 궁궐 밖 집에 있을 수 없어서 부득이 그대로 하여금 궐내에 들어와 살게 하였다. 금중은 번거롭고 어지러운 장소이니 그대의 평소 마음에 맞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매번 스스로 두려워하여 갈수록 더욱 불편해하다가 끝내 깊은 병으로 고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실로 나의 탓이로다.>

궁궐 밖에서 살다가 궐내로 들어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이 들어 죽었다는 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살벌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론이 노론 인물 170여 명을 쳐냈던 임인옥사의 빌미가 되었던 ‘소훈이씨 독살설’의 진위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돌아가서 대궁(숙빈최씨)을 뵈옵거든 나의 안부를 아뢸 때 만약 오늘의 큰 한을 안다면 심회를 대략 말하고 대궁께 대신 고하도록 하리라. ……옛날에 내가 점지해둔 묘지는 이제 그대가 묻힐 무덤이 되었다. 세상 모든 일이 진실로 예측하기 어려워서 그대가 이미 이와 같은데 내 살 날을 어찌 믿겠는가!>

수길원이 어머니 장례 때 이미 자신의 묫자리로 잡아뒀던 곳인데, 이제 정빈 이씨에게 내줘서 어머니를 모시도록 하겠다는 효심이 엿보인다. 생전에 서너 해를 함께했을 뿐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제향까지 함께 받아가며 수백 년을 수굿이 지내오고 있으니 말이다.

<죽은 후에 의탁할 곳이 있으니 밝은 혼령에 의지할 것이다. 길택을 정하였으니 나의 마음이 위로된다.>

수길원을 길택으로 꼽는 건 무리가 없으리라. 정빈이씨의 벼슬은 사후에 자꾸만 높아졌으니, 소훈(종5품)이 영조 즉위년에 소원(정4품)으로 올랐으며, 영조 4년에 정빈(정1품)으로 추증되었다. 그뿐인가. 불과 10세에 죽은 아들 효장세자의 벼슬 또한 이산(정조, 사도세자의 아들)의 양부가 됨으로써 진종으로 추증되고, 나중에는 대한제국 진종소황제로 추증되지 않았던가.

이제 형제간의 우애를 짚어볼 차례다. 왕의 여인인 궁녀를 취하는 것은 대군이라도 용납되지 않는 게 법도였다. 오직 세자는 동궁에 배속된 궁녀를 취할 수 있었다. 대군도 아닌 군(연잉군)의 신분으로 궁녀였던 정빈이씨를 소실로 맞을 수 있었던 것은, 형(경종)의 따뜻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뿐 아니다. 소론이 연잉군을 축출하려고 벌인 임인옥사 때 ‘경종을 암살하기 위한 실험으로 소훈이씨를 독살했다’는 고변에 따라 노론 인물들을 몽땅 내치면서도, 경종은 아우 연잉군을 끝까지 감싸 안았다. 그 눈물겨운 형제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어머니들은 불구대천지원수였으며, 경종의 후원세력은 소론이고, 연잉군의 후원세력은 노론이었다. 두 형제 사이에 가로놓인 천야만야 벼랑을 정빈이씨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 메웠던 것이라고 믿고 싶다.

소령원숲은 수백 년 세월이 길러낸 극상림이다. 우리나라 숲은 장마철을 앞둔 이맘때가 가장 싱그럽고 아름답다. 심호흡으로 숲의 정기를 흡입하면서, 수길원이 복원되고 상시 개방되어 정빈이씨의 따뜻한 마음씨가 세상에 널리 펴지기를 기원한다.

취재: 강병석 시민기자

작성일 : 2019-6-4 조회수 :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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