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5일 (토)
역사와 전통
유네스코문화유산 왕릉답사
- 소령원 제향

“여러분께 행복을 듬뿍 나눠 드리려고 하늘을 탁 열어젖혔더니, 연둣빛 산과 들판이 반갑게 맞아주네요. 여러분 행복하시죠. 오늘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장릉과 파주삼릉을 둘러보고,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사친인 숙빈 최씨의 원소 소령원과 영조의 후궁이자 진종의 사친인 정빈 이씨의 원소 수길원에서 거행되는 제향에 참례하게 됩니다.”

장릉

[장릉]

소령원

[소령원]

제향

[제향]

빈자리 없이 꽉 찬 관광버스가 출발하자 파주문화원 문화해설사회 김순자 회장의 안내방송이 시작된다.

“오백 년 이상 이어진 왕조의 왕릉이 훼손 없이 남아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태조 이래 왕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은 사람은 27명이지만, 왕후와 왕위에 오르지 못했어도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도 왕릉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모두 42기나 됩니다. 북한 개성에 있는 태조왕비 신의왕후의 제릉, 정종의 후릉을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파주스타디움에서 탄현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에 챙겨야 할 기본 상식은 많았다. 능, 원, 묘 등에 설치한 병풍석, 난간석, 석수(석호, 석양, 석마), 석상(상석 또는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 석인(문인석, 무인석),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 재실에 이르기까지.

“조선왕릉은 대부분 한양 4대문 10리 밖 100리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궁궐에서 출발한 임금의 참배 행렬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지요. 강원도 영월의 장릉(단종)과 여주의 영릉(세종)만 예외입니다.”

파주장릉

파주장릉에는 제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가 잠들어 있다. 원래는 문산읍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조성하고, 훗날 인조가 사망하자 예정대로 옆에 모셨다고 한다. 그런데 뱀과 전갈이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이변이 계속되자 무려 81년 동안이나 논의를 계속한 끝에 영조 7년(1731년)에야 탄현면 갈현리로 옮겨왔다. 조선이 명분을 중요시 여겼음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 합장하면서 석물은 옛것 그대로 사용하고, 일부 규격에 맞지 않는 병풍석, 난간석 등만 새로 마련했다. 덕분에 17세기와 18세기의 석조물들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장릉 재실

[장릉 재실]

“인조는 가장 불운했던 임금 중 하나였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자신을 왕위에 올린 반정세력의 논공행상과 권력다툼으로 ‘이괄의 난’을 겪었습니다. 그때 파천했던 공산성에서 어떤 농부가 가져온 떡이 너무 맛있어서 신하들에게 ‘절미(絶味)로구나, 이 떡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떡을 만든 이의 성이 임씨라는 말을 듣고 ‘임절미’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다음엔 청나라 대신 망해가는 명나라를 섬기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리며 항복을 바친 일입니다. 그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게 됩니다.”

홍살문

[홍살문]

장릉

[장릉]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금천교라는 돌다리다.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과 현세를 구분해주는 장치라고 한다. 금천교를 지나면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앞에서 제향을 모시는 정자각까지는 얇은 돌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하는데, 혼령이 이용하는 신도(향도)와 참배자(왕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도와 일반길인 변로로 구분된다.

장릉은 보존 관리상 비공개였다가, 2018년 9월부터 전면 개방되었다.

소령원과 수길원의 제향

소령원과 수길원은 광탄면 영장리에 있다. 옛날 지도를 더듬어보면, 혜음령 고갯마루에서 오른쪽 서서울CC 아래 혜음원지를 거쳐 박달산 뒤편으로 됫박고개까지 이어지는 길을 확인할 수 있다. 벽제에서 광탄면 기산리로 뻗은 367번 지방도가 개설되기 전에는, 한양에서 소령원으로 가려면 혜음령을 오르고 됫박고개를 넘어야 했던 셈이다.

“고개가 워낙 가팔라서 쌀을 말로는 못 가져가고 됫박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다고 하여 ‘됫박고개’였는데, 나중에 영조가 더 파서 낮추라고 하여 ‘더파기고개’로 불리기도 했고, 영조가 그 고개를 넘어오다가 왕이 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해서 ‘수령령’이라고도 했답니다. 요즘 지도에는 덕파령(德坡嶺)으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소령원

[소령원]

수길원 안내판

[수길원 안내판]

능천교를 건너 소령원 숲길은 어머니 치마폭에라도 휩싸인 듯 포근하다. 해설사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왕릉의 숲을 극상림이라고 하는데, 침엽수림과 혼합수림 단계를 지나 참나무와 단풍나무처럼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활엽수들이 가장 안정된 단계인 극상에 이르렀다고 간주되는 숲이라고 한다. 말끝에 길가에서 노란꽃의 잎사귀를 따 빨갛게 배어나는 즙액을 보여주고는, 피나물이라고 하였다.

“소령원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사친 숙빈 최씨의 원소입니다. 원소란 왕세자, 왕세자빈, 임금의 사친의 산소를 말합니다. 수길원은 영조의 후궁이자 진종의 사친 정빈 이씨의 원소입니다. 진종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입니다.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열 살 때 죽고, 이복동생 사도세자가 왕세자가 되었으나 그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함에 따라 진종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소령원과 수길원은 가까운 곳에 이웃하고 있는데, 어찌되었든 고부간이었던 두 사람이 죽어서도 나란히 있는 셈입니다.”

제향
수빈최씨와 정빈이씨의 제향이 차례로 거행

[제향]

그래서일까. 수길원의 문은 굳게 닫힌 채, 소령원 정자각 앞에서 숙빈최씨와 정빈이씨의 제향이 차례로 거행되고 있었다.

사모관대를 갖춘 제관들 옷 빛깔이 연둣빛 산야와 어울려서 향기로운 솔바람을 부르는 듯 싶었다. 아쉬운 점은, 원소 전체를 둘러볼 수 없었던 것. 두 곳 모두 평소에는 보존 관리상 비공개여서 접근조차 어려웠다. 오늘은 그나마 정문을 통과해 홍살문 앞에 발을 딛고 정자각과 원소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랄까. 괜히 옆쪽 영조의 시묘살이터 돌담을 둘러보기도 하면서, 제향이 끝날 때까지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서성였다.

홍살문 앞에 발을 딛고 정자각과 원소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제향

[제향]

파주삼릉

파주삼릉은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있다. 재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잘 자란 야광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이제 막 피어나려는 듯 꽃봉오리가 여물었다. 더도 말고 사흘만 기다려주면 야광나무답게 한밤중에도 재실 안마당을 환하게 비춰줄 것이련만.

공릉은 예종의 원비였던 장순왕후가 세자비로 있다가 1461년 17세에 요절하자 이곳에 조성되었는데, 한명회의 셋째딸이다. 순릉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가 1474년 19세에 죽자 이곳에 조성되었는데, 한명회의 막내딸이다. 그로써 한명회는 상당부원군이 되었으며, 두 자매는 왕실의 법통으로 숙질간이 되어 이웃에 묻혔다.

삼릉 재실 야광나무

[삼릉 재실 야광나무]

순릉

[순릉]

영릉은 그로부터 수백 년 후인 1728년 효장세자가 10세의 나이로 죽자 이곳에 조성되었는데, 훗날 정조의 양부가 됨으로써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공릉, 순릉, 영릉을 합쳐서 파주삼릉이다. 공교롭게도 요절한 세자와 세자비들이 이곳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공릉

[공릉]

영릉

[영릉]

2019년도 가족과 함께하는 파주문화유산답사는 4월부터 11월까지 총 8회 실시되며, 매월 1일 9시부터 신청을 받는다.

2019년도 가족과 함께하는 파주문화유산답사

취재: 강병석 시민기자

작성일 : 2019-5-7 조회수 :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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