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1일 (일)
많이본 기사
역사와 전통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던 신하, 송곡 정연

조선시대의 왕은 말 그대로 지존이었다. 왕의 말은 곧 법이어서, 어기거나 이견을 내놓으면 왕권도전으로 인식되어 귀양을 가거나 사사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시대에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서슴없이 직언을 쏟아낸 충절의 관리가 있어 소개한다. 조선 전기의 문인 송곡 정연이다.

정연묘 안내판

[정연묘 안내판]

정연묘

[정연묘]

정연(鄭淵 1389 창왕 1∼1444 세종 26)의 본관은 연일, 자는 중심(仲深), 호는 송곡(松谷)으로 1405년(태종 5)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관직에 나가 지평으로 재직하던 중 영의정 하륜(河崙)을 탄핵해 국문을 받았으나 속죄되어 풀려났다.

태종 14년 10월 정연은 수상(首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첩의 일로 사사로이 형조를 움직였다며 영의정 하륜을 거침없이 탄핵했다. ‘그의 직(職)을 파하고 외방에 안치하여 대신의 경계를 삼도록’ 강력히 건의했다. 당시 정연은 정오품 벼슬인 사헌부 관헌이었다.

1420년(세종 2)에 다시 장령이 되었을 때는 상왕(上王: 태종)이 철원에 가려는 것을 간하다 진산에 유배되었다. 1426년(세종 8)에는 노비의 일로 무리한 송사를 한다며 효령대군의 잘못을 책하도록 세종임금께 아뢰었다.

1424년 장령이 되었고, 이어 선공감정·집의·동부대언, 형조·이조·병조의 참판을 지냈다. 1430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중추원사와 형조·병조의 판서로 재직하였다. 병조판서로 있던 1444년(세종 26) 6월, 병으로 사직하였고, 다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으나 동년 7월 졸하여 파주 탄현면 법흥리에 예장되었다. 부인은 단양 우씨이며, 두 딸을 태종의 외손자인 권담(경안공주의 아들)과 안평대군에게 출가시켰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원리’라고 주청한 강직한 신하 정연, 그가 죽자 세종 임금은 제문을 통해 ‘군부의 책임자로서 기밀을 오래 맡아 국가의 군사 행정에 조치가 빠짐없었고, 말을 기르는 정사 또한 계획 있게 잘하여 내가 특별하게 소중히 여겨 믿고 의지함이 더욱 도타왔도다.’며 ‘의원을 보내어 약을 주고 행여나 쉬이 쾌복이 되어서 나에게 좋은 보필이 될까 하였더니, 하늘이 무심하여 문득 죽기에 이르렀는고!’ 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정연묘비

[정연묘비]

부인 단양 우씨 묘비

[부인 단양 우씨 묘비]

정연의 묘는 고려시대의 묘제인 장방원형분(앞면이 사각)으로 부인과의 합장묘 앞에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형태인 화관석(花冠石) 묘비 2기가 나란히 서있으며, 특이하게도 상석 두 개가 따로 놓여 있다.

2000년 10월 연일정씨 정숙공파 종중에서 1,330m²(403평)의 넓이에 후면 곡담과 난간 등을 설치하고 묘역을 새로 정비했다. 장명등과 향로석, 상석 받침돌 등은 이때 설치한 석물이며 경기도 기념물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장릉 안내문

[장릉 안내문]

장릉

[장릉]

1731년(영조 7년)에 문산읍 운천리에 있던 인조 장릉이 인근으로 천장되면서 바로 옆에 있던 교하향교는 금촌 택지지구(당시 교하지역)로 옮겨졌다. 정연 묘 또한 국법에 따라 이장하려 하였으나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쳐 옮길 수 없었다는 설이 전해온다. 차로 5분 이내 거리이니 세계문화유산인 장릉도 함께 들려보길 권한다.

○ 찾아가는 길: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산148

취재: 김순자 시민기자

작성일 : 2019-4-2 조회수 : 147
  • 목록으로
  • 프린트
  • 트위터
  • 페이스북

컨텐츠 만족도 조사

홈페이지내의 서비스향상을 위한 시민 여러분들의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