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7일 (수)
역사와 전통
파주의 독립운동가 107인을 기억하며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맨 처음 반응을 보인 것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이었다. 이의 영향으로 재일 한인 유학생들은 1919. 2. 8. 조선 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1919.1. 21. 고종황제가 급서하자 일본의 독살설로 인해 국내 민심이 흉흉했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33인 민족대표가 3월 1일 독립선언을 전국, 전 세계에 알리고 독립만세를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파주 역시 이러한 전국적인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파주문화원에서 발간한 파주독립운동사에 따르면 1919. 3. 10. 교하공립보통학교 임명애 등 100여명의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3. 25. 염규호가 김수덕, 김선명, 임명애, 김창실 등과 더불어 시위를 계획하여 와석면 일대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만세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김웅권 등과 함께 군내 월롱, 교하 아동, 조리면 등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모의하였다.

(현)광탄면행정복지센터

[(현)광탄면행정복지센터]

기념비에 묘사된 시위 군중의 모습

[기념비에 묘사된 시위 군중의 모습]

파주 최대의 3.1만세 사건은 3월 27일, 28일 양일에 있었던 공릉장날의 만세시위였다. 공릉장날의 만세 사건은 심상각(沈相恪)의 주도하에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이근영, 이종구, 유영 등이 주동이 되어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두고 대표 19명이 모의하고, 군내는 물론 고양군 일부까지 공릉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한 것이다. 3월 27일 2천명의 시위군중이 광탄면 사무소에 집결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조리면 봉일천리 공릉장터로 행진하여 그곳에 있던 1천여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파주 3.1운동 발상비

[파주 3.1운동 발상비]

광탄중학교

[광탄중학교]

광탄 발랑리에서 계획하여 공릉장에서 만세 거사를 주도했던 심상각은 그 뒤 중국 상해로 망명해 상해농업전문학교에 적을 두고 신교육을 받으면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약 10년간의 임시정부 활동을 마감하고 국내에 돌아와서는 신간회에서 활동했다. 이후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廣灘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파주독립광탄공원

[파주독립광탄공원]

파주출신 독립운동가 107인

[파주출신 독립운동가 107인]

3.1운동의 근원지였던 광탄면 발랑리에 '파주독립광탄공원'을 조성하고 항일 운동정신을 알리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곳 파주독립광탄공원에 있는 항일독립운동기념비에는 자랑스러운 우리 파주의 독립운동가 107인의 이름을 새겼다.

기념비 건립문

[기념비 건립문]

항일독립운동기념비

[항일독립운동기념비]

광탄은 고구려 시대에는 술이홀현에 속한 곳이었으며, 양주군 백석면과 광탄면 양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임진강으로 합류하여 넓은 여울을 형성하는 데서 광탄(廣灘)이라 했다. 광탄에는 국가지정문화재만 해도 윤관장군묘, 소령원, 수길원, 혜음원지가 있으며, 유수한 사찰인 보광사, 용암사가 있다. 용암사 용미리 석불입상은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파주 3.1운동 발상비: 광탄면 신산리 134-1
○ 파주독립광탄공원: 광탄면 발랑리 142

취재: 김용원 시민기자

작성일 : 2019-2-26 조회수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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