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5일 (월)
역사와 전통
조희일(趙希逸), 종로구 효자동의 유래

조희일(趙希逸)은 1575년(선조 8)에 태어나 1638년(인조 16)까지 살다간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호는 죽음(竹陰) 또는 팔봉(八峰)이다. 아버지는 운강 조원(趙瑗)으로 여류시인 이옥봉이 조원의 첩이었다.

오늘날 종로구 효자동은 조희일 형제로 인해 생긴 동네다. 임진왜란 때 한양이 유린되고 임금마저 피난길에 오르자 아버지 조원의 본실 처 역시 세 아들과 함께 철원으로 피난을 가다가 왜적에게 잡힐 위기에 처한다. 둘째 희철이 어머니와 피하다가 죽었고, 첫째 희정 역시 잡혀 죽는다. 이에 셋째 희일이 어머니를 업고 샛길로 빠져나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쌍홍문(雙紅門)을 이들 형제가 사는 마을에 세웠다. 거기가 바로 종로구 효자동이다. 희일은 인조반정 후 홍문관교리·부응교에 제수되어 경연관을 겸했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강화로 호종하기도 했다.

조원의 묘비

[조원의 묘비]

조희일 신도비

[조희일 신도비]

조희일은 삼전도비와도 관련이 있다. 인조실록에 보면 삼전도비 탄생과 관련한 기사가 있다. 병자호란 종전 후에 청나라 측의 강요로 청나라 태종의 공적비를 세우게 되는데 이때 인조가 장유ㆍ조희일 등에게 명하여 삼전도비의 글을 짓게 하고 이경석의 글을 택하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인조가)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글을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이 글을 썼다”

삼전도비 안내판

[삼전도비 안내판]

삼전도비

[삼전도비]

조희일의 저서에는 그의 호를 딴 ‘죽음집’ 등 10여 책이 있다. 파주와 관련하여 ‘공릉가는 길에’ 라는 한시가 전한다.

공릉 지나는 길에

우뚝 솟은 왕릉 길에 말 세우니
푸른 산에 해 저무는 때로구나

바람 부는 여울에 졸졸졸 물 흐르고
숲에 깃든 새는 여기저기 울어대네

좁은 산길에 잡초는 언덕에 이어지고
외딴 마을에 꽃은 울타리에 흐드러졌네

길 따라 좋은 풍광 흥취 가득하니
하늘 끝 떠나는 길 깨닫지 못하는구나

[조희일, 공릉 지나는 길에(恭陵道中), 전편]

조희일의 묘

[조희일의 묘]

문인석과 망주석

[문인석과 망주석]

조희일의 묘: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혜음원지 임천 조씨 묘역 맞은편 (비호사격장 옆 소재)

취재: 김용원 시민기자

작성일 : 2018-12-11 조회수 :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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