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6일 (일)
많이본 기사
역사와 전통
열녀문, 그 아픈 역사를 돌아보며...

지난 11월 10일 ‘사진속 기억의 재생-이야기가 있는 사진전’이 열렸다. 그런데 장소가 다소 이색적이다. 운정 호수공원 내에 있는 ‘충렬의 집’이다. 현대식 공원에 옛 전각이라니. 호기심이 발동해 안내문을 읽어 보았다.

운정 호수공원 내에 있는 ‘충렬의 집’이다.

[충렬의 집: 교하읍 야당리 산 341-1(파주시 향토유적 제21호)]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16남 중 막내아들 양원군의 4대손 전주이씨 충렬공 상원군 이세령 가문의 ‘충신 열녀 정려 편액’이다. 호주제도가 폐지된 남녀 평등시대에 열녀문이라니! 가문의 종중 어른들이 나와 계시기에 전주이씨 상원군 종회 회장님과 총무님께 사연을 들어봤다.

병자호란(1636년 12월) 때 충신 이세령은 인조의 아드님이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인열왕후(인조의 정비)의 혼전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셨다. 1637. 1. 22.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세령은 자분했고, 뒤이어 어머니 상주김씨, 부인 문의조씨, 제수 청주한씨(인열왕후의 동생)가 순절하였다.

오랑캐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택한 여인들. 나라에서는 이들에게 정려를 내렸고, 충신 이세령은 충렬공 상원군으로 증직된다.

종회 총무가 방문객들에게 설명하는 모습

[종회 총무가 방문객들에게 설명하는 모습]

충신 열녀정려 편액

[충신 열녀정려 편액]

1900년대 초반까지 정려를 종가(야당리 341번지)의 대문에 모시다가 가속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신주와 정려편액의 보존 및 관리가 어렵게 되었다. 야당리 일원에 살던 후손들은 별묘를 지어 안치하고 종회를 구성하여 제향을 모셔왔다. 2000년대 초반 운정신도시 개발구역에 묶여 또다시 존폐의 위기에 처했으나 집안 어른들의 온갖 노력 끝에 지켜낼 수 있었고 2006. 10. 04. 파주시 향토유적으로 지정 받았다.

내친김에 파주의 또 다른 열녀문인 월롱면 능산리 아가산 자락에 위치한 ‘청풍김씨 열녀비’를 찾아가 보았다.

‘청풍김씨 열녀비’

[청풍김씨 열녀: 월롱면 능산리 산33-1(파주시 향토유적 제 7호)]

청풍김씨의 남편 조중협은 단종 때 생육신 조여의 현손 조감선생의 6대손이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자신의 모지를 잘라 피를 흘려 입안에 넣어드리는 등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지만 결국 운명을 달리 한다. 이에 낙심한 조중협도 시름시름 앓더니 세상을 뜨게 된다. 1737년(영조 13년) 청풍김씨는 남편 조중협이 죽자 한달여의 대소상을 마치고 끓는 물을 몸에 부어 순절했다. 이에 1750년(영조 26) 열녀 정려를 내리고 남편은 사헌부지평에 증직 됐다.

마을 노인회장인 조석래님에 따르면 직손이 없어 찾아오는 이는 없지만 문중 자손들이 다니러 오면 이야기해 준다고 한다. 저리 모질게 목숨을 끊어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며 봉서리로 향한다.

봉서리 충신 열녀문

[봉서리 충신 열녀문: 파주읍 봉서리 산94-1]
(파주시 향토유적 제5호)

신평 송씨 현판

[좌측: 충신 김복경 / 우측: 신평 송씨 현판]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충신 김복경(1545~1592)과 병자호란때 굳게 정절을 지킨 그의 며느리 신평 송씨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다. 신평송씨는 통덕랑 김검의 처로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삼각산 기슭으로 피난을 가던 중 청군에게 잡히자 12월 10일 자결했다. 1639년 나라에서는 송씨 부인의 정절을 표창 열녀로 봉안하고 『정녀 통덕랑 김검처 공인 신평송씨지려』란 현판을 내렸다.

병자호란으로 나라 전체가 짓 밟혀 처참했을 당시 상황이 눈에 어린다. 발길을 마지막 목적지로 돌린다.

김석몽처 남평문씨 열녀문

    [김석몽처 남평문씨 열녀문: 파주읍 백석리 산20]

(파주시 향토유적 제4호)

남평문씨 정려 현판 및 열려 정녀기

[남평문씨 정려 현판 및 열려 정녀기]

일찍이 김씨가문에 출가한 문씨는 효행이 뛰어나고 현모양처로서의 부덕을 갖춘 부인이었으나 젊어서 남편을 잃었다. 그 후 뜻을 견고히 하여 수절하던 중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갑자기 악한이 달려들어 문씨를 겁탈하려 하자 저항하다 순절하였다. 1764(영조 40)년 정려를 내렸고 『열려 정녀기』와 함께 현판이 걸려있다.

고금을 통하여도 변하는 않는 여인상이 있다. 바로 ‘현모양처’다. 가정이 바로 서고, 자녀 교육이 제대로 되려면 어진 아내이자 훌륭한 어머니는 반드시 필요하다. 열녀문을 당시의 규범과 도덕 실천으로만 규정짓기에는 부족하다. 전쟁으로 나라가 짓밟힌 상황에서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며 고귀한 희생의 증거물이었다.

취재: 이은경 시민기자

작성일 : 2018-12-4 조회수 : 252
  • 목록으로
  • 프린트
  • 트위터
  • 페이스북

컨텐츠 만족도 조사

홈페이지내의 서비스향상을 위한 시민 여러분들의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