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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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니(Kenny)상사 전공비

케니는 1.4 후퇴와 관련 있는 인물이다.

1950. 6.25 남침으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낙동강에 방어선을 쳤으며 9.15일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의 배후를 차단하고 반격에 나섰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후퇴하는 북한군을 쫒아 10.2일 38선을 넘었고 10.19일에는 평양을, 10월 말에는 압록강 유역인 혜산진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격해 올라갔다. 김일성은 산악지대인 평안북도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그들은 북한이 무너지면 코앞에 미군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는 안보상의 위협 때문에 한국전에 개입한다. 중국은 1차로 1950.10.19일 26만 병력을 압록강 너머로 파병했으며, 10.25일에는 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을 창설해 북한군과 연합사령부를 구성했다.

1950.10.25일 중공군의 본격적인 참전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밀려 내려오는 중공군을 막지 못하고 유엔군은 그해 11월 말부터 퇴각하기 시작했다. 12. 4일 평양에서 철수하고 함경도 장진호에서 반격에 실패한 유엔군은 12.14일 흥남부두를 철수한다. 12. 6일에는 평양을 빼앗기고 12월 말에 북한군이 38선 지역까지 남하하게 된다. 이듬해인 1951년 1. 3일 의정부 방어선이 뚫리고 마침내 1. 4일에는 서울을 넘겨주게 되는데 이를 1. 4후퇴라고 부른다. 중공군 개입으로 38이남으로 후퇴할 때 미군 소속 케니 상사는 한 개 소대규모의 병력과 함께 파주군 법원읍 배내리를 지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적군 전차가 나타나서 소대 전체가 전멸직전이었다. 분대장이었던 케니 상사는 부하 2명과 전차를 향해 돌진하여 공격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전사하고 소대는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케니 상사 전공비석
케니 상사 전공비

전공비에 새긴 글자에 그의 이름과 계급, 태생지가 나와 있다. 그리고 그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죽었으나 그의 거룩한 정신은 영원할 것이라고 새기고 있다. (SERGEANT KINNEY LIE HERE INTERRED. HE WAS DIED FOR FREEDOM AND PEACE. HIS HOLY WILL WOULD LIVE FOREVER). 미국은 6.25때 참전국 중 가장 많은 572,000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중 전사, 부상, 실종자를 포함한 사상자는 모두 142,091명에 이른다. 케니 상사는 이들 미군 전사자 중의 한 명이다.

전공비에 새긴 글자에 그의 이름과 계급, 태생지가 나와 있다.
그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죽었으나 그의 거룩한 정신은 영원할 것이라고 새기고 있다.

비는 높이 0.45m, 기단 0.55m의 화강석이며 대한상무회 파주군 연합본회가 1958. 7. 4일 건립했다. 뉴욕출신이었던 그는 이역만리 대한민국에서 평화를 위해 산화했다. 그의 희생정신을 기리며 (사)국가유공자환경운동본부 파주시지회가 그의 전공비를 정성껏 관리하고 있다. 이처럼 케니 상사는 국민들의 가슴속에 이 땅을 위해 목숨을 바친 평화의 사도(使徒)로 남아있다.

소재 :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46
※ 전공비는 ‘방미교’ 부근 법원리로 가는 364번 도로변 왼편에 있다.

비는 높이 0.45m, 기단 0.55m의 화강석이며 대한상무회 파주군 연합본회가 1958. 7. 4일 건립
이처럼 케니 상사는 국민들의 가슴속에 이 땅을 위해 목숨을 바친 평화의 사도(使徒)로 남아있다.

취재 : 김용원 시민기자

작성일 : 2018-11-1 조회수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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