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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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이 아름다웠던 조선시대의 관리
- 청백리 김덕함의 묘와 신도비

적성에서 양주로 넘어가는 고개를 설마치고개라 부른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신라의 삼국 통일을 지원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달리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설마치 고개 아래에는 조선 중기에 대사헌을 지낸 청백리 김덕함(金德?1562 ~ 1636)의 묘가 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즈음해 청렴하고 강직했던 조선시대의 관리(공무원) 김덕함 선생을 소개한다.

김덕함은 조선 중기에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참의와 승지·부제학·대사성·대사간·여주목사·춘천부사를 거쳐 1636년(인조 14) 대사헌에 오른 인물이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스스로 학문을 익혀 1587년(선조 20) 생원시에 합격, 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延安)에서 이정암(李廷?)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청백리 김덕함의 묘와 신도비

1617년(광해군 9년)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자 이항복 등과 강력히 반대하다 남해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1622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예조·병조·형조·공조의 참의와 승지·부제학·대사성·대사간·여주목사·춘천부사를 거쳐 대사헌의 자리에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1636년(인조 14년) 청백리로 선정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그해 12월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신도비>에는 ‘일곱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새로 부임하는 곳의 이로움과 병폐를 강구하여 개혁함으로써 백성을 감동시켰고, 임기를 채우고 돌아갈 때에는 한 가지 재물도 가져가지 않았다.’라고 적혀있다. 사는 내내 의복이 허름했고, 나물과 국 한 그릇으로 끼니를 이었다고 전한다.

신도비

신도비

재실

재실

중중회 표지석

중중회 표지석


김덕함 묘와 신도비(경기도 시도기념물 제144호)는 감악산 깊은 산 속에 있어 찾아가는 일이 녹록치 않으나, 새로 뚫린 감악산 3, 2, 1터널을 지나는 길은 마치 강원도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절로 들뜨게 된다.

찾아가는 길은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산2번지, 묘역 입구에 문화재 안내판과 함께 상산김씨종중회라는 표석이 있으니 이곳에 주차를 한다. 묘역 근처에 군사 훈련장이 있어 통행을 제한하지만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어 진입은 가능하다.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20여 분 산길을 오르면 갈래길이 나오는데 우측으로 조금 더 직진하면 멀리 산자락에 세 기의 묘가 보인다. 맨 아래는 통덕랑 김동혁의 묘, 중간은 예조판서 김연의 묘이고 맨 위의 묘가 부인 경주이씨와 함께 묻힌 김덕함의 묘이다.

조개풀꽃

조개풀꽃

갈떡

갈떡

토종 민들레

토종 민들레


각시붓 꽃

각시붓 꽃


할미꽃

할미꽃

조개풀꽃

솜방망이

이곳은 산이 깊고 인적이 드물어 갖가지 야생화가 피어 오는 이들을 반겨준다. 가는 길에 감악산 출렁다리와 설마리 영국군 전적비도 함께 보기를 추천한다. 아울러 다스리던 고을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던 청렴한 관리! 오늘의 관리들 또한 뒷모습이 아름다운 옛 사람의 발자취를 되짚어 따라주기를 권한다.



취재 : 김순자 시민기자

작성일 : 2018-5-15 조회수 :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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