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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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김행(金行)
-장포선생 묘역에서 내일의 길을 묻다

김행(金行)은 1532(중종 27)출생하여 1588(선조 21)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주도(周道), 호는 장포(長浦)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청백리 김행
김행의 집 전경

어려서 파산서원 배향인물인 백인걸(白仁傑)과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수침은 성혼(成渾)의 아버지인데 성혼과 동문수학하고 평생 골육처럼 지냈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전적(典籍) ·형조좌랑 ·호조좌랑 ·예조정랑 ·한성부서윤 ·성균관사성(司成) ·사도시정 등의 내직을 지냈다. 또 무장현감(武長縣監) ·고양군수(高陽郡守) ·사천군수 ·양주목사(楊州牧使)ㆍ광주(光州)목사 등 외직을 지냈다.

현판
글씨에 능하였는데 필법이 대단히 생동 있고 호방하여 당대의 명필도 따를 수 없을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글씨에 능하였는데 필법이 대단히 생동 있고 호방하여 당대의 명필도 따를 수 없을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무예와 지략 역시 뛰어났다. 그가 1588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 왕명을 띠고 국방상 주요 변경지역을 순찰하던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의 천거로 전라병마절도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신립과의 인연은 김행이 1588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립이 광주에 들러 하루를 소일하면서 종일 활을 쏘았으나 김행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신립은 두만강 건너 야인들을 평정하여 이름을 날린 장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임금이 수령 가운데 장수가 될 만한 인물을 찾자 신립은 김행을 추천하게 된다.

광주(光州)목사를 끝으로 관직생활을 마치는 동안 그는 일관되게 청빈 ·강직한 삶을 살았다. 한때는 그의 집에 불이 나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도왔는데 집에 쓸 만한 가재도구 없어 옮길 물건이 없었다. 그가 죽자 염(殮)할 옷이나 천이 없어 조문객들의 옷을 벗어서 염을 했을 정도였다. 하찮은 물건이라도 사사로이 소유하지 않았다고 하니 공인으로서의 귀감을 보여준 셈이다.

김행의 묘 비석
김행의 묘
김행의 묘 앞 비석
김행의 묘 전경

묘소에 있는 비의 아랫부분은 거북이 형상이었고 머리 부분인 이수에 새긴 용은 매우 사실적이었다. 묘소는 완만한 경사지에 김행을 비롯한 강릉김씨 후손들의 묘역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묘소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장문화력발전소가 보였다. 묘소 아래에는 후손들이 살고 있었으며 장포선생영당이라 이름붙인 사당에서 매년 시제를 드린다고 한다.

문득 나는 그의 묘소에서 나는 왜 수 백 년이 지난 고인들의 무덤을 찾아다니는가 하고 반문해 보았다. 내 아내와 아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 무려 43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묘소가 잘 관리되고 있어 감탄이 나왔다. 매년 많은 후손들이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간혹 나 같은 사람이 참배하니 놀라운 일이다. 정말 인생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왔다.

장포 김행 묘역(파주시 향토유적 24호)
-파주시 문산읍 휴암로 531번길 68-24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 산24-10)

취재 : 김용원 시민기자

작성일 : 2018-5-08 조회수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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