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4일 (화)
역사와 전통
쇠와 불과 씨름해온 반세기
파주대장간 한근수 야장
파주 유일의 대장간 잇는 한근수 대장장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사라져버린 대장간의 문을 아직까지 열어둔 채 야장(冶匠)의 맥을 지키고 있는 파주 유일의 대장장이 한근수 선생. 그는 1945년 파주 장단의 진동면 초리에서 태어났다. 6살 되던 해 6.25전쟁이 일어나 폭격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1.4후퇴 때 누이와 남동생, 여동생 등 4남매와 정든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금촌 수용소 마을에 정착했으나 당시 젖먹이 남동생이 죽고 뒤를 이어 여동생마저 굶어 죽었다. 전쟁으로 부모와 두 동생을 잃고 누이와 단 둘이 된 선생은 인근 금촌초등학교 졸업 무렵 서울 문래동에 사시는 큰아버지 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큰댁으로 옮기자마자 큰아버지의 소개로 인근 영일동에 위치한 ‘곽산대장간’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나이 14살이었다. 건축자재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곽산대장간은 주로 건축에 필요한 꺾쇠 등을 만들었는데 20여 명 직원 중 가장 나이어린 선생에게 주어진 일은 풍구질이었다. 화덕에 불을 지피는 풍구질을 하며 눈치껏 다른 일들을 배워 나갔다.
이렇게 곽산대장간에서 11년간을 지내면서 대장장이가 갖추어야 할 웬만한 기술을 모두 익히게 되었다. 그 당시 곽산대장간 주인은 김지명 선생으로 평안도 곽산 출생이라 곽산대장간이라 했으며 한근수 선생의 대장장이 기술은 김지명 선생으로부터 전수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누이가 결혼을 하여 파주 용주골에 살면서 누이로부터 법원리대장간을 소개받고 11년간의 곽산대장간 생활을 청산하고 법원리대장간에서 일하게 되었다.
20대 중반 청년의 나이로 법원리대장간으로 내려오니 서울 곽산대장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시골이라 그런지 이 곳 대장간은 농기구 만드는 일이 주를 이뤘다. 법원리대장간에서 처음 받은 월급은 3천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생은 이 곳의 직원들이 낫을 만들 때 낫자루 끝을 마무리하는 낫 당개미를 직접 손으로 만드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주인에게 낫 당개미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 보겠다고 해 허락을 받고 결국 기계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되자 작업이 매우 빠르게 되었고 대장간 주인은 3천원 주던 월급을 1만5천원으로 올려줘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

대장간 불황 깊을수록 대장장이 자존심도 깊어져
법원리대장간에서 약 5년간 근무한 선생은 광탄 파주대장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3년여를 근무하다 주인이 다른 사업을 하게 되면서 대장간 전부를 인수받게 되었다. 당시는 1970년대 중반으로 파주에도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었고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 수요가 무척 많을 때였다. 당시 파주에는 각 면마다 대장간이 있어 농기구들을 공급했는데 5일, 10일 장이 열리던 광탄장날이 되면 장날 하루에만 호미 2만 개를 팔았다 한다. 낫도 연간 1만 개 정도가 팔려나갔으며 당시 인근 부대에 도끼를 비롯한 여러 도구들을 납품하기도 했다. 많은 물량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직원 5명을 두고 일했지만 장날 물량을 대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파주대장간이 가장 호황을 누린 것은 바로 70년대다. 이 때는 돈도 꽤 많이 벌었다. 5자녀를 모두 대장간을 운영 해 번 돈으로 교육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장간의 호황도 잠시, 80년대 들어서면서 기계화영농이 시작되고 농약(제초제)이 보급되면서 호미, 낫을 비롯한 농기구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대장간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줄었다. 각 면마다 있던 대장간들도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근수 선생은 어려서부터 평생을 해 온 대장장이의 일을 그만 둘 수 없었다. 다른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문을 닫지 못한 채 대장간을 운영하다 보니 이제는 파주에서 유일하게 남은 대장간이 되었다. 요즘도 대장간을 찾는 사람들은 간혹 있다.
그러나 예전에 문전성시를 이루던 대장간과 비교해보면 한가롭기만 하다. 만원하는 낫은 1년에 3백 개 정도, 그리고 2천 원 하는 호미는 고작 5백 개 정도가 팔려 나간다. 워낙 수입이 없어 기계로 만든 다른 철물들도 구색을 갖춰놓고 팔고 있으나 한 달 수입이 1백만 원이 채 안되는 실정이다.
대장간 안은 매우 좁다. 12평 건물 한켠에 화덕이 있고 그 옆으로 모루와 각종 집게 등 작업도구들이 걸려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만든 호미, 낫, 쇠스랑 등이 시렁에 주욱 걸려 있다. 매일 같이 불을 지폈던 화덕은 이제 주문이 있거나 광탄장날을 기해 가끔 불을 지피곤 한다. 옛날에야 낫 한 자루를 만들려면 철근을 잘라 화덕에 수십 번 담금질 하여 모루에 대고 망치로 두들겨 모양을 잡아가는 과정을 거쳤으나 지금은 혼자서 두들김질을 할 수 없어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준기 선생은 대장간 문을 닫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장장이 출발점이었던 곽산대장간 생활도 잊지 못한다. 지금도 한 선생이 만든 물건에는 곽산대장간을 의미하는 ‘산(山)자’를 새겨 그 정신과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숱한 달굼질 망치질 담금질을 거쳐야하는 대장간 물건처럼 산(山)자를 새길 때마다 대장장이 반세기 인생은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진다.
취재 / 이윤희(파주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전문위원)
작성일 : 2006-11-22 조회수 : 1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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