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9일 (일)
소통과 나눔
내가 겪은 6.25
일곱살 아이의 기억 속엔...

“폭격이 있었던 건 기차가 출발하고 5분후, 기차는 이미 다음 역에 도착한 다음이니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6월의 한 낮. 평상에 앉아 한가로이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와 함께 저공비행을 하던 비행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비행기의 출몰이 잦아졌다고는 해도, 몇 번을 보아도 호기심의 대상이었기에 비행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돌연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꽝” 귀청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일곱 살의 나이에 그렇게 크고, 무서운 소리는 처음이었다. 북한은 전라선, 장항선, 호남선의 기착지 철도 교통의 중심지 이리역을 폭격해 교통을 마비시키려 했다.

역으로 가는 길목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곧이어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혼비백산했다. 친구와 함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절로 가기 위해, 조금 전에 쌀자루를 짊어지고 집을 떠난 큰오빠가 기차역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아들의 안위가 궁금해 역사로 가려던 아버지는 곳곳을 지키고 있는 경찰의 제지를 받고 힘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큰오빠의 소식은 그렇게 알지 못한 채 피난 짐을 꾸려야했다.

피난 준비를 재촉하는 부모님의 성화에, 작은 오빠와 함께 방안에서 서둘러 운동화를 신었다. 뛰다 넘어지면 운동화가 벗겨진다고, 바닥과 발등부분을 긴 끈으로 꽁꽁 묶어주면서, 아버지는 신신당부했다. “둘이서 손을 꼭 잡고 가야한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나무그늘로 뛰어가서 귀를 꼭 막고 땅에 엎드려라!” 이렇게 해서 일곱 살 위의 작은 오빠와 함께 이모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 어머니 없이는 무섭다고 가지 않으려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또 30 리쯤 떨어진 이모 집의 위치를 잘 모르는 작은 오빠를 위해, 아버지는 도중까지 한참을 동행해주고는, 짐을 챙겨가지고 어머니와 함께 곧 뒤이어 온다며 돌아갔다. 자식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안전한 곳에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 아이들끼리만 길 떠나보내는 걱정보다 앞서 있었던 듯했다.

뛰어가다 비행기소리가 나면 땅에 엎드리고, 작은 내를 건너기도 하고, 숨이 차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뛰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나이차는 있었지만 바로 손위라서 작은오빠와는 티격태격 평소 싸우기도 많이 했었는데, 그때만큼은 손을 놓으면 헤어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세상에 둘도 없는 다정한 오누이가 되어 겨우겨우 이모 집에 도착했다.

이모 집은 이미 피난 온 다른 친척들로 방이 모자라 아버지의 친구 집에 방 한 칸을 빌려 피난살이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친구 집은 대농이어서 식량걱정은 없었는데, 우리를 따라온 또 다른 식구인 커다란 개가 문제가 되었다. “사람도 먹을 게 없는데 차라리...” 동네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 다음 날, 우리 개, 워리는 사라졌다. “우리 워리는 영물이라서 동네 사람들이 한 말을 듣고 집을 나갔다”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동네 개들이 짓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는 밤이면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대동아 전쟁만 아니었다면...” 3대독자의 장남을 일본에 유학 보내고 잃어버린 적이 있는 어머니는 늘 아쉬워하며 한탄했다. 남북긴장이 높아지며, 사회가 뒤숭숭해지자 위험을 느낀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남을 잃은 후 장남이 된 큰오빠를 혹시나 전쟁이라도 나면 하는 불안감에서 피신을 시키기 위해 절로 보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절로 향한 후 소식이 묘연해 부모를 애태우던 큰오빠가 얼마 만엔가 돌아왔다. 집에 써놓고 온 아버지의 편지를 보고 피난지로 찾아온 것이었다. 수염은 자라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고 발에는 다 헤어진 신을 신고 있었다. 큰오빠를 붙잡고 울던 어머니의 기쁨의 눈물은 전쟁에 잃어버린 장남 생각으로 슬픔이 겹쳐서일까 통곡이 되었다.

얼마 후. 비워둔 집이 궁금했던 아버지와 큰오빠는 길을 나섰다. 전쟁 통에도 도둑이 들어 집은 엉망이 되어있었고 심지어 고추장, 간장 항아리까지 털려있었다고 했다. 집을 돌아보고 있는데 가까이서 폭격이 있었나보다. “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갑작스러운 폭격소리에 놀라 아들을 챙길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혼자 몸을 숨긴 아버지는, 안전한 장소를 찾아주는 아들에게 순간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나 친구 분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은 신기한 비행기에 대한 환상을 공포의 대상으로 바꾸어놓았다. 넓은 마당 한쪽에 파놓은 땅굴은 비행기소리만 나면 무조건 뛰어 들어가 숨는 곳이 되었었는데, 어느 날 밤 어린 나이에도 좀 무안한 일이 벌어졌다. 동네 어른들과 함께 앉아있었는데 비행기소리에 놀라 깜깜한 땅굴로 뛰어 들어간 나는 아무리 기다려도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알았다. 혼자 숨은 땅굴은 지하수가 스며들어 질척대는 바닥에, 모기떼의 습격도 만만치 않았다. 공습이 있을 때마다 안전을 지켜주던 땅굴이 찰나에 무서운 공간으로 느껴졌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비행기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무서워서 나올 수가 없었다. 비행기소리가 멀어진 다음에 머쓱해하며 기어 나온 내게 아버지는 적군비행기소리와 우리비행기소리의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B29 폭격기의 섬뜩한 소리는 지금도 기억해 낼 수 있다. 어른들 따라 행동해야 된다는 것도 터득했다. 그 이후론 혼자서 땅굴로 뛰어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옆집의 큰 감나무가지가 담을 넘어와 떨어지는 감꽃을 주워 먹던 그 떫은맛의 기억은 감나무 집 여인의 슬픈 모습을 함께 떠오르게 한다. 늘 방문을 열어놓고 그 앞에서 미동도 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서있던 모습. 그리고 왜 그리 흰옷만 입고 있었는지? 사람들은 그 여자가 정신이 나갔다고 했다. 전쟁터에 동원된 신랑을 그렇게 기다리는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감이 익어갈 무렵 우리 식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일곱 살의 기억에 남아있는 6.25는 모진 고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매일 작은오빠 따라 강가에서 작은 조개 줍고, 고기잡이 하던 일. 처음 먹어본 단수수의 달디 단 맛, 동네 큰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무언지 모르는 열매를 따먹던 일, 집 뒤 대나무 숲에서 알록달록 새알이 들어있는 새집을 보던 일 등,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매일 방학이라도 맞은 냥 즐겁게 뛰어놀던 경험이다.

일곱 살 꼬마가 겪은 6.25는 전쟁에 대한 비참함과는 비교적 동떨어진 경험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전쟁이 평화로운 일상생활을 뒤흔들어 놓는 무서운 것이라는 것, 전쟁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어린 마음에도 충분히 공포로서 각인되었다. 더구나 이민족과의 전쟁이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다는 것이 비극이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분단해결의 해법이 요원한 채로 남아있다.

한반도 허리춤에 금 하나 그어놓고 나라가 두 동강이 난 지금. 그 금을 지워버려 할 이유는 분명하다. 생김새가 같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한 민족이 참혹한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동강 난 두 개의 퍼즐을 맞출 방법은 없는 것인지......

○ 글 : 윤소자 idsheep@gmail.com

작성일 : 2010-06-22 조회수 : 4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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