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4일 (월)
소통과 나눔
변함없는 향기처럼 그녀는...
다리가 꺾이듯 주저앉았던 나의 삶, 다시 일으켜


선득선득 바람이 분다. 가녀린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릴 때마다 그녀 생각이 난다. 작년 가을에는 아들을, 이 봄엔 딸을 다 결혼 시킨 그녀, 빈방을 들여다보며 쓸쓸함을 삭이고 있을 그녀에게로 붉은 화살나무 잎사귀 같은 내 마음을 실어 보낸다. 달이 휘엉청 밝아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일렁인다. 텅 빈 집안에서 그녀는 뭘 하고 지낼까 남편은 또 멀리 현장에서 일주일에 한번 들른다는데 밤새 잠이나 편히 잤는지 궁금하다. 며칠 전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던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자꾸만 윙윙거린다. 고추잠자리가 맴을 돌 듯 그녀의 목소리는 흩어지지 않고 거실을 서성거린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거의 이십 년이 되어간다. 큰아이는 중학교 2학년,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그렇게 정들었던 변두리의 작은 도시를 뒤로하고 온통 새집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만 올라가는 아파트촌으로 마음이 들떠서 이사를 온 거였다. 온통 논과 밭이었던 터에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으로 삐쭉삐쭉 올라가던 아파트, 허리띠를 졸라매며 간신히 장만해 가지고 온 아파트, 은행에 줄을 두 시간씩 서가며 청약해서 얻어낸 집, 일처럼 쫓아다니면서 매달렸으니 지어지는 모습도 몇 번씩 보고 싶어 달려와서 황홀하게 올려다보았었다.

일산신도시, 그녀와 난 각처에서 뜨내기처럼 이사와 가까워지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던 이웃이었다. 집의 평수로 사람을 평가하던 풍조가 만연할 때이니 말붙이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집은 큰 평수, 나는 작은 아파트에서 서민으로 살아내던 탓에 서로 닭 보듯 무심한 사이였었다. 서로가 사는 세상이 다른 듯 길 건너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반듯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공원길을 가로질러 건널목을 건너면 아이들 학교, 저녁 자율학습 때문에 도시락을 싸들고 오후 다섯 시 반이면 그 길을 걸었다.

벤치에 앉아서 아직 식지 않아 따뜻한 도시락을 무릎에 올려놓고 기다리노라면 그녀도 내 시선 안에서 나와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곤 했다. 오로지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며 잘되길 바라는 무언의 기도를 올리는 그런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말을 걸었고 날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우리는 정이 들어갔다.

어느 때는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아주 쓸쓸한 표정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도 종종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큰 슈퍼라도 들러올라치면 어김없이 그녀가 눈에 띄었다. 반갑다고 자전거를 세우고 같이 앉아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나도 아파트에서 눈치 보며 한 마리 작은 개를 기르고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게 말동무가 되어갔다.

그녀의 아이들도 똑같은 나이이니 걱정거리도 비슷했고 관심사도 비슷했다.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같은 반이 된 적은 딱 한번이었지만 어느새 우리는 마음속에 간직했던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일에만 몰두하는 남편과의 갈등도 나와 비슷해서 우리는 만나면 남편 흉을 실컷 보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큰 아이 작은 아이, 대학도 어느 대학으로 진학했는지 알 수 있었고 군대도 어느 곳에서 근무하는지 다 알면서 서로의 집에도 드나들며 정을 쌓아갔다. 아이들과의 갈등도 비슷하게 겪어서인지 서로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형제처럼 의지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전화통을 붙들고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다 사는 게 더욱 시큰둥해지면 둘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오늘은 북한산엘 갑시다."
"그럽시다."
흔쾌히 시간을 허락하는 그녀는 내겐 한 떨기 꽃이었다. 향기를 담은 채 내게로 오던 꽃이었다. 강경 젓갈을 사러 기차 타고 갔던 적도 있고,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춘천에 들러 닭갈비에 소주를 들며 마땅치 않은 가족들과의 갈등도 성토하며 그렇게 재미나게 살았다. 다 키워 놓으니 제멋대로라고 우리의 황금 같은 시간은 어디서 찾느냐고 중년의 허허로움을 읊조리곤 했다.

내가 이곳 파주로 이사 오는 바람에 그녀 곁을 멀리 떨어져 왔어도 우리는 변함없이 중간쯤에서 만나서 점심도 같이 먹고 좋은 영화도 같이 보는 단짝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나 아이들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비밀을 공유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를 향기로 채우는 소중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이제 아이들이 기러기처럼 짝을 찾아 우리 곁을 떠난다. 그녀는 다 이룬 일들이 나는 올해와 내년으로 닥쳐올 것이다. 얼마나 허전하고 외로울 것인가. 아이들이 쓰던 방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공허함이 밀려들까.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다정한 목소리에 향기를 담아 그녀에게로 자박자박 걸어간다. 위로주 한잔 어떻겠느냐 약속을 잡는다. 그녀로 인해 해마다 단풍들 듯 아름다운 인생길이었노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녀의 향기는 나를 취하게 하고 다리가 꺾이듯 주저앉았던 나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 글신현임 hyoja5712@naver.com
 
           1957년 파주에서 태어나 탄현면에 살고있다. ‘08년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동상 수상경력이 있으며,
           현재 파주문협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작성일 : 2009-09-21 조회수 : 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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