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4일 (월)
소통과 나눔
꽃 진 자리가 훈장처럼 보일 때가 있다
세상 탓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행동으로...
 

비온 뒤 착 가라앉은 공기에 한점 바람이 불어 장미 향내가 풍긴다. 피고 지고 또 피면서 화단 가득 고운 웃음을 피워 물었다. 계단을 내려서니 먼저 피었던 꽃잎을 떨 군 꽃 진 자리가 군데군데 볼품없이 다가온다. 할 일을 다 끝냈어도 무언가 할 일이 남은 듯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늘 하던 대로 장미꽃에 입을 맞추고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반려견과 산책길에 나섰다.

삼층으로 된 빌라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도 화단에 관심이 없다. 일층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이층은 더더욱 아니고 꼭대기 삼층이야 멀어서 더더구나 꽃 하나 심는 주인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늘 깨끗이 단장된 화단엔 푸른 이끼가 카펫처럼 덮여있다. 십여 개의 동 가운데 유난히 우리 동 화단만 그러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보랏빛 줄기를 가진 과꽃이 가지런히 심겨져 있다. 마치 운동장에서 아침조회를 서는 초등학생처럼 줄 맞춰 심겨져 있다. 누군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잡풀도 매어주고 꽃모종도 정성껏 심었기 때문이리라. 누구일까? 누가 이 더운 날 화단에 촘촘히 꽃을 심는 노고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십년 전에 우리는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이 그저 공기 좋고 조용한 곳이라 이사를 결심했었다. 뎅그러니 홀로 있는 단독은 외로워 보이고 관리실도 있고 이웃도 많은 이 빌라가 마음에 쏙 들어서 이사를 결심했다. 그때도 이웃이 되어 반갑다고 우리 집까지 들여다 보아준 분이 있었다. 이웃이 이사를 가건 오건 관심을 두는 일이 별로 없는데 초면에 자상하게 대해주시니 너무 반갑고 힘이 되었다. 육십 대 중반의 그는 알이 두꺼운 안경을 끼고 비쩍 마른 몸으로 무척 소탈하고 부지런해 보였었다.

나중에 차츰 알아가니 이름 하여 우리 동네 조회장으로 통하는 분이었다. 동 대표 회장도 지내고 노인회장도 몇 년 하면서 우리 동리의 지킴이가 된 분이었다. 요즘은 실버경찰로 주위의 쓰레기도 주워 주위를 청결하게 하는 일을 하신다. 같은 동에 살면서 든든한 이웃이 되어 주니 공연히 마음이 푸근히 놓였다. 쓰레기 문제며 분리수거 문제며 겨울 눈 치우는 문제며 셔틀버스 문제며 늘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운동에서 돌아오다 보니 그분이 나무 그늘에 앉아 꽃을 심고 있었다.

별안간 꽃 진 자리가 보드라운 꽃보다 더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 조회장과 그 꽃 진 자리가 커다랗게 오버랩 되었다. 장미가 꽃잎을 떨 군 자리는 볼품없는 상처의 딱지 같은 흔적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자리가 숭고한 인생의 비밀 하나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 무언의 가르침을 주는 듯 했다. 깨달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인생의 지혜 한 가지가 터득되는 순간이었다. 아름답고 여린 꽃잎을 공손히 바쳐주던 꽃 진 자리였던 것이다.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완성하고도 티내지 않는 주름진 손 같은 것이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러 가다 그만 빙판에 넘어져선 어지러움 증에 살림을 놓아버린 부인을 대신해서 집안 살림까지 하는 분, 봄에 쑥떡을 나누어 먹으려 들렀을 때 집안이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 돼있어 깔끔한 분이구나 생각했었다. 틈틈이 텃밭도 가꾸어 상추니 호박이니 우리 집까지 슬며시 문으로 밀어 넣어 주시곤 내려가신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면서도 칠순이 넘은 나이에 관리실 아저씨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뙤약볕에 앉아 꽃을 심고 있는 거였다. 아무도 들여다보고 관심 가져주는 이 없어도 묵묵히 며칠을 걸려 동 전체 화단에 꽃을 심으신 거다. 그러니 우리빌라가 파주시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로 뽑힌 것은 당연한 일, 오히려 젊은이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몸을 사리는데 노인의 몸으로 그저 묵묵히 사리사욕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얼른 들어와 홍삼 한 컵을 따라 쟁반에 바쳐 들고 내려갔다. 왠지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어서다. 가을에 꽃이 피면 시 한 수 지으라고 농담을 곁들이신다. 가을이 오면 큰언니의 미소 같은 과꽃이 가득히 피어서 내 감성을 자극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저절로 시가 써지지 않겠는가. 나는 계면쩍게 웃어 보였다.

세상은 언제나 이기적인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이타심이 많은 지혜로운 이들이 있어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한다. 그저 세상 탓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행동으로 훈계를 주시는 분들이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모습을 은연중에 우리에게 보이는 분이다. 나라를 지탱하는 아주 기초 단위의 참 이웃으로 인해 살맛나는 세상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오늘 오각형의 꽃 진 자리가 유난히 크게 훈장처럼 다가드니 나의 말년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마음속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 글 : 신현임 hyoja5712@naver.com
         1957년 파주에서 태어나 탄현면에 살고있다. ‘08년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동상 수상경력이 있으며,
         현재 파주문협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작성일 : 2009-08-17 조회수 : 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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