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30일 (월)
소통과 나눔
동화 읽어주는 할머니, 시 쓰는 할머니
- 은빛세대 ‘책마중’의 아름다운 노년이야기 -

2012년도 추산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여성 84세, 남성 77.3세에 이른다. 이 수치는 해마다 늘어날 것이다. ‘100세 시대’ 운운하는 것이 성급한 일만은 아닌 듯하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개인적으로는 ‘인생 후반부’에 대한 대비가, 국가적으로는 노령인구에 대한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우리는 ‘동화 읽어주는 할머니’


70세 전후의 할머니들이 모여 독서동아리를 만들었다. 3년 전 교하도서관에서 진행된 ‘은빛세대 책 읽어주기’ 강연이 계기가 됐다. ‘책마중’ 동아리가 회원들은 지금 아이들에게 ‘동화 읽어주는 할머니’로 자리매김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책마중에서 봉사하고 있는 이는 회장 안정옥 씨(73세)를 비롯해, 함혜성(71세), 곽인숙(79세), 안홍승(68세), 임청자(70세) 회원 총 다섯 분이다.


  


“매주 목요일은 교하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줘요. 오후 4시부터 30분 정도. 아이들 연령대를 고려해 여러 종류의 책을 선별한 다음, 현장 상황에 맞춰 읽어주지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마치 다른 세계에 빠져있다 나오는 기분입니다.”



책마중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안정옥 씨의 말이다. 도서관에서 책 읽어주는 봉사를 시작하면서 동화구연도 따로 배웠다고 한다. 모두들 열정이 대단하다. 당시 회원들에게 동화구연을 지도했던 곽인숙 회원(79세)의 말을 들어본다.

“저는 사실 그 전에 이미 동화구연을 하고 있었어요. 69세 되던 해, 그러니까10년 전에 ‘전국여성 동화구연대회’에서 1등을 했거든요. 당시 심사를 맡았던 엄기원 아동문학작가가 ‘나이 든 사람이 출전한 건 최초이고 또 대상까지 했으니 이건 큰 변화의 시작이다’라 평했을 정도로 제 수상이 획기적인 것이었어요. 그 후 10년 동안 어린이집에서 활동을 해왔어요. 교하도서관에서 ‘책 읽어주는 할머니’를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고 갔다가 이분들을 만났고요. 이분들을 만나 함께 일하게 돼 기쁩니다.”




곽인숙 씨의 지도로 회원들은 단순히 책을 읽어주는 것에서 나아가 동화구연까지 접하게 됐다. 또한 구연대회에 나갔던 회원 모두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회원들의 영역은 확장돼 어린이집 동화구연활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파주시노인복지관이 추진하는 노인일자리사업 중 하나다 . 매주 두 곳씩 선정해 한 달에 총 8회 어린이집을 방문한다. 차비 격으로 매달 20만원씩 받는다. 동절기를 제외한 3월에서 12월까지, 9개월 동안 활동한다.


“요리가면 요리 보고, 조리가면 조리 보고.... 꼭 해바라기 같아요”


“글을 모르는 아이들은 내가 요리가면 요리보고, 조리가면 조리보고…. 꼭 해바라기 같아요. 재밌게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요. 다 끝났을 때 ‘와~’ 몰려들어 품에 안기는 아이들을 보면 눈시울이 시큰해져요.”

직접 만든 소품을 들고 동화구연을 하는 곽인숙 씨.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실감나게 들려줄까 아직도 연구하게 된다고 한다. 10년 경력이면 타성에 젖을 만도 하건만, 아직도 아이들 앞에 서면 마치 하늘이 준 일인 양 몸짓도 표정도 풍부하게 아이들 눈높이로 변한다.

“저는 바라던 삶을 살고 있는 셈이에요. 어렸을 적에 외할머니가 늘 저를 옆에 끼고 장화홍련, 콩쥐팥쥐 같은 동화를 읽어주셨는데, 그래서인지 어린 마음엔 ‘나도 이다음에 늙으면 느티나무 아래에 돗자리 깔고, 하얀 모시 넓은 치마 입고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주는 할머니가 돼야지.’라고 생각했거든요. 전 어릴 적 꿈을 이룬 겁니다.”

79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표정이 활기차다. 늦은 나이에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한 것만도 놀라운데, 10년간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래서 난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노년의 희망을 본다.

“2004년 3월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어요. 아플 시간도 없어요. 아이들과 교감하기 때문에 안 늙어요. 더 재미있게 해주기 위해 오카리나도 배우고 우쿨렐레, 난타도 배우고 있답니다.”


큰 집에 사는 큰 사람, 큰 소리로 말해요. 안녕안녕 안녕~♪
작은 집에 사는 작은 사람, 작은 소리로 말해요. 안녕안녕 안녕~♪
다음에 또 만나요~~~♪


아이들과 작별 인사 노래를 나누며 돌아서 나오는 길. 다음 달엔 동극(童劇, 아동연극)으로 ‘뚱만이와 뚱실이’를 할 것이라며 들떠있다. 이제 그는 농부로 분장하고 ‘나는 너희들이 좋다. 뚱뚱해도 좋다, 건강하기만 하면 좋다’ 며 뚱뚱한 아이들을 위로할 것이다. 그가 들려줄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우리는 시 쓰는 할머니, <마음속의 글 끌어내기>


책마중 회원들은 동화 읽어주는 봉사를 하는 외에, ‘마음속의 글 끌어내기’라는 이름으로 시 공부 모임을 따로 하고 있다. 책마중이 ‘책 읽는 파주’ 동아리 공모에서 2년 연속 우수동아리로 선정되면서 그때 받은 상금으로 선생님을 모시게 됐다 한다. ‘은빛세대’라는 틀을 넘어 보다 젊은 사람들도 함께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기 위해 모임 이름도 ‘은빛세대 글쓰기 교실’에서 ‘마음속의 글 끌어내기’로 바꾸었다.

“60대, 50대 회원도 있어요. 최근엔 40대 회원도 들어오고요. 보다 많은 이들이 들어와 모임이 활성화되면 좋은 일이니까요.”

다독(多讀)에 글 쓰는 걸 좋아해 매 시간 빠뜨리지 않고 시를 제출하는 안정옥 씨. 그는 시화전과 시집 출간을 염두에 둘 정도로 시가 빼어나다. 안홍승 씨 또한 시 제출을 빠뜨리지 않는다. 처음엔 어설펐던 시가 수업과 합평을 받으며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회원들이 극찬한다. 그 외에 함혜성, 곽인숙, 임청자, 최순자…. 모두 적극적이다. 이들 중엔 이미 수필집을 낸 이도 있고 대학에 출강하는 이도 있다.




시를 잘 쓰건 못 쓰건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고 확장해가는 시간은 즐겁다. 수업은 자신이 쓴 시를 복사해와 회원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합평이 이어진다. 조심스럽지만 정확한 지적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선생님은 ‘이건 무슨 뜻이죠?’ ‘다른 표현으로 바꿔 보실래요?’ ‘연을 합치면 어떨까요?’ 등등 지극히 보조적인 선에서 제안한다. 글쓴이의 의도를 존중하는 것이다.

미처 자신의 시를 준비하지 못한 이들도 다른 이의 시 합평엔 적극적인 편이다. 그러면서 시를 보는 안목이 늘고 어쩌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시 모임은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고 자기탐색이며 관계형성이고 자아실현의 장이다.



실버세대의 글쓰기, “어렵게 생각지 말아요”



회원 중에는 이미 책을 내고 문인협회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도 있다.

“수필집을 두 권 냈어요. 한 권은 2008년에 출간한 ‘행복한 글방’이라는 책, 또 한 권은 고희기념으로 작년에 출간한 ‘마음의 향기’예요. 40년 동안 가정생활만 해오다 환갑을 맞았는데, 그때 드는 생각이 ‘이제 나는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나?’하는 것이었어요. 성격상 허송세월 하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문화센터 글쓰기 강좌에 등록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죠. 그런 것들이 모여 책이 됐습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면서 일산수필 회장을 역임한 함혜성 씨(71세).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부심과 성취감을 얻었다 한다. 그가 쓴 책의 서문이 인상 깊다.




부질없이 살아온 지난날, 너무 아쉬움에 몸부림칠 때 희미하게 비추이는 빛이 있었습니다...푸른 하늘 높이 솟아 홰를 치며 창공을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내 안에 숨어있던 찬란한 언어들을 알알이 꺼내어 소복히 담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 함혜성의 첫 수필집, <행복한 글방> 서문 중에서


글에서 지난 시간에 대한 허망과 앞날에의 기대가 동시에 느껴진다. 집안 살림을 하며 보낸 시간 동안 돌보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회한과 함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느끼는 행복이 묘한 대비를 이루어 번져 나온다.

“인생 후반부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고 꼭 문학이 아니어도 좋으니 자신을 성찰해서 ‘나는 뭘 하겠다’, 찾아냈으면 해요.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깜냥’이 다르니까요. 글쓰기로만 본다면 ‘시’ 보다는 수필이 더 사실적이라 접근하기 쉬울 수도 있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쓰다보면 늘어가는 게 글이다. 또 안 늘면 어떠냐? 이게 난데.’하는 배짱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실버세대의 글쓰기에 너무 문학적 평가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흔히 주위에서 ‘내 삶은 소설 대여섯 권으로도 모자랄 거야.’라고 말하는 이들을 본다. 그러나 선뜻 자신의 삶을 글로 남기는 이들은 많지 않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지나치게 문학적 평가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 아닐까. 젊은 날엔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다면 이젠 자신에 충실해도 좋을 시간이다. 동화 읽어주기와 시 쓰기 공부를 병행하며 알찬 나날을 보내고 있는 책마중 회원들을 응원한다. 그들에게서 노년에 빛날 시집이나 자서전 몇 권 기대해 본다.


■ 교하도서관 : 파주시 동패동 1692 / 031-940-5153
■ 책마중 회장 안정옥 : 010-2363-5126


   취재: 전경애 싱싱뉴스 시민기자

작성일 : 2013-09-3 조회수 : 3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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