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30일 (월)
소통과 나눔
디자인으로 세상을 더 낫게
- PaTI, 입학설명회를 가다 -

올해 초 파주출판도시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ju Typography Institute, 이하 PaTI)가 문을 열었다. PaTI(파티)는 대학, 대학원과정에 해당하는 디자인 중심의 대안학교다. 작지만 큰 꿈을 꾸는 학교, 디자인으로 세상을 더 낫게 바꾸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곳. 8월 10일, 마침 입학설명회가 있어 찾아가 봤다.




학교는 파주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내에 위치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입학설명회 안내문에서부터 잠시 혼란이 온다. ‘배곳’, ‘흙날’… 생소한 언어들이다.

“‘배곳’은 학교의 순우리말입니다. 주시경 선생이 사용하셨죠. 그래서 ‘한배곳’은 ‘한’이 크다(大)의 뜻이니 ‘대학’을 칭하며, ‘더배곳’은 더 배운다는 의미니 대학원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흙날’이요?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그저 한자를 우리말로 바꾼 겁니다. 그러면 월요일은 달날, 화요일은 불날 … 오늘이 토요일이니 흙날.”

마치 통과의례를 치루는 기분이다.

작지만 큰 꿈을 꾸는 디자인학교

타이포그라피는 좁게는 ‘인쇄에 있어서의 문자배열’, 넓게는 레이아웃이나 디자인을 의미한다. PaTI는 우리 고유의 언어이자 정체성인 한글의 정신과 얼(디자인정신)을 이어받아, 한글타이포그라피를 통해 디자인으로 세상을 더 낫게 바꾸고자 하는 이들이 뜻을 모아 세운 학교다.

“우리는 작고 가난한 학교입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자율적 공생을 지향하는 협동조합학교예요. 작지만 큰 꿈을 꾸는 학교, 독창적인 배움틀로 제다움(정체성)에 바탕을 둔 교육을 추구합니다. 한국엔 ‘권위가 무너져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PaTI가 ‘Institute(연구기관)’라는 말을 쓴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다보니 입학 선발기준은 ‘길동무’를 뽑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길을 서로 믿고, 밀고 끌고 갈 수 있는 길동무를 맞이하는 것이지요.”

학교의 이념과 목표, 정체성에 대해 설명하는 안상수 교장의 말에서 나직하지만 묵직한 힘이 느껴진다.




파티는 디자인 대안대학

파티의 설립자 안상수 씨(61세)는 전 홍익대 시작디자인과 교수다. ‘안상수체’의 개발자이면서 한글타이포그라피를 통해 한글의 현대적 조형미를 세계에 알려왔다. 2007년에는 독일 라이프치히시가 수여하는 ‘2007 구텐베르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10년 전부터 타이포그라피학교에 대한 구상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녹색대학 장회익 선생을 만나 대안대학에 대한 밑그림을 구체화하고, 뜻을 같이하는 디자이너를 모아 PaTI를 개교한 것이 2013년 2월 24일. PaTI를 위해 지난해 8월, 정년을 5년 앞두고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창의와 디자인’을 중시합니다. 머리만이 아니라 손, 가슴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파티는 ‘손’을 중시해요. 손에서 비롯된 창의를 존중합니다. 또한 정체성에 바탕을 둔 교육을 추구합니다. 드로잉 수업 중에 ‘자화상’그리기가 있는데,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다움(정체성)에 대해 인식이 목적입니다. ‘자기다움’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의 시작이니까요.”

‘손’에서 비롯된 실기를 중요시하고, 한국적 가치와 함께 ‘나’라는 정체성에 토대를 두는 교육, 그러면서도 학교는 한국과 동아시아를 넘어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로 뻗어가는 디자인문화를 꿈꾼다.




네트워크 학교, 지구적 가치 추구

“‘지구적 가치’는 국가적 가치의 상위개념입니다. 파티는 작은 학교이지만 파주출판도시를 네트워크의 허브로 삼아, 주위의 학교, 단체와 손잡고, 나아가 국외로 뻗어갈 겁니다.”

파주출판도시가 곧 캠퍼스이고, 이곳에 있는 전문가들과 시설 모두가 파티의 교육자원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PaTI가 손잡고 있는 교육자원은 다양하다. 




네트워크 학교로는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힐스), 승효상 건축학교(2014년 개교예정), 명필름 영화학교(2015년 개교예정), 열화당 사진학교(2015년 개교예정), 임동창 풍류학교가 있고, 시설로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활판공방, 열화당도서관, 마로니에북스 타셴책방, 미메시스미술관, 두성종이, 안그라픽스,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그리고 홍대 앞 네크워크로 땡스북스, 상상마당 디자인서당, 다중지성의정원, 소운서원, 숨도, 요기가표현갤러리, 자음과모음, 생강의원 등이 있다. 그 외에 국제적 네트워크로서 스위스 바젤디자인학교, 중국 중앙미술학원, 모스크바 고등그라픽디자인학교와도 연계된다.




수업은 워크숍과 특강, 프로젝트와 여행으로 이루어져

“파티의 스승은 크게 기둥(담임)과 워크숍 스승으로 나뉩니다. 기둥스승은 배우미의 마음을 살피는 이로 ‘파티’라는 집안을 이끌어가는 어머니 같은 존재지요. 수업이 주로 특강과 워크숍 형태로 이루어지다 보니, 나머지 분들은 전부 워크숍 스승이에요. 다들 분야의 전문가들이고요. 별도로 생업이 있고 워크숍 때만 수업을 맡습니다.”

입학설명회를 주관하는 안상수 교장의 설명이다.

파티의 워크숍 스승은 다양하다. 현장의 디자이너나 다른 학교, 그리고 외국의 전문가를 초청해 수업을 듣는데, 일일이 열거하는 건 힘들어 보인다. 지난 학기에 다녀간 외국 스승만을 살펴본다면, 네빌 브로디(Neville Brody, 영국, 타이포그라피의 거장)가 개교강연을 했고,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 스위스)의 영자타이포그라피 워크숍이 2주간 있었다한다. 곧 뤼징런(중국 북디자이너)이 내방해 한자타이포그라피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프로젝트로는 ‘파파 프로젝트’라고 해서 강연이나 큰 주제에 따른 작업물을 만들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출판하는 장기 프로젝트가 있어요.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저자와 대화하고 콘텐츠를 생산해 내게 돼,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자연스레 경험하게 되지요.”

북디자인 수업과 연계돼 타이포그라피를 응용하는 고도의 작업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책은 출판사를 통해 단행본으로 출간된다고 한다.

여행 또한 파티 수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한다. ‘길 위의 멋짓’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길 위에서 몸으로 배우는 디자인수업을 지향한다. 올해 4월 지리산 여행이 있었는데, 시인, 화가 등 예술인을 만나며 걷고, 순천의 한 학교를 페인팅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가을학기에는 한국타이포그라피 기행과 더배곳의 일본디자인 기행이 예정돼 있다.




워크숍 수업은 ‘내 책상 만들기’에서부터 시작

파티에서 진행하는 워크숍의 형태는 다양한데, ‘내 공간 멋짓기’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내 책상과 의자 만들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책상과 의자를 직접 만들어요. 화판이나 철근을 사다가, 혹은 다른 폐품을 이용해 직접 재단하고 만들지요. 용접까지 할 경우도 있어요. 주로 재활용품을 많이 이용합니다.”

마침 이날 입학설명회에 도우미로 참석했던, 한배곳과정의 정연지 학생(20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뭔가를 ‘직접 한다’는 건 책임감이 생기고 끝까지 해야 해서 의미 있어요. 또 여기선 언니, 오빠라는 호칭을 쓰지 않아요. 본명, 혹은 별명에 ‘님’자도 안 붙이는 걸요. 교장선생님도 그냥 별명(날개)으로 부르면 돼요.”

언뜻 막연해 보이던 학교의 체계가 조금 윤곽이 잡히는 듯하다.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곳. 나이와 직위에서 오는 권위보다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밀고 끌고 가는 길동무가 필요한 학교.

파티는 종합예술의 장

첫 워크숍으로 ‘내 책상 만들기’가 진행되고 나면,  이어 다양한 수업이 워크숍 형태로 이어진다. 근처 ‘활판공방’은 타이포그라피를 위한 공식 실기교실이다.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납활자 활판인쇄 작업장. 모든 조판과 인쇄가 컴퓨터로 이루어지는 요즈음 활판공방이야말로 손으로 감각을 익히고 세밀함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작업장이다.

매주 수요일은 ‘인문수업의 날’이라고 한다. 홍대 앞 다중지성의정원과 소운서원, 상상마당 디자인 서당 등에서 철학, 역사, 글쓰기, 동의학 등의 인문교양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자기 몸을 관찰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일찍 발견해내는 데 있어 중요합니다. 우리는 시작을 여기서부터 합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 허준의 ‘동의보감’ 등 동의학이 그 시발점인데, 이 분야는 앞으로 강화해나갈 계획입니다.”

인문학 수업 중에 동의학, 즉 ‘몸’에 대해 공부하는 이유가 뭐냐고 한 참석자가 묻자, 안상수 교장이 답한 대목이다. 이어 그는 ‘몸에 대한 재인식이 가장 전위적’이라는 말에 공감한다고 덧붙였다.




‘몸’에 대한 공부는 인문학 외에 감각확대로도 이어진다. 워크숍과 비슷한 형태로 진행되는 이 수업은 눈을 가리고 맨발로 거리로 나가는 것이다. 안내인이 동행하지만, 이는 안전을 위한 보조요원일 뿐, 시각을 차단함으로써 촉각, 청각을 살리고, 이를 채집해 표현하기 위함이다.

잠시 교실을 둘러보는데 책상 위에 색색의 병들이 눈에 띄었다. 물감이라고 하기엔 허름한 튜브 병들. 청계천에서 안료를 사와 직접 삼원색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 그 다음 색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자기만의 색 이름을 붙여 사용한다는 파티만의 물감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재료부터 내가 직접 제작함으로써 뭔가 달라지는 계기가 된다고 한다.




그 외에 사진, 서예(손멋글씨), 입체와 공간, 실크스크린, 북디자인 수업, 정기발표회 등 워크숍이라는 형태로 파티가 접목하고자하는 예술의 분야는 다양하다.

“입학하고 싶죠”

입학설명회 내내 몰입하던 이가 있다. 당산동에서 ‘그와 그미’라는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현재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권으뜸 씨(31세).




“수업의 내용이 좋았어요. 특히 오감을 써서 시각 표현을 극대화하려는 ‘감각확대’수업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그동안 북 디자이너로서 시각적인 일을 다루며 한계를 느껴 왔거든요. 보이는 것 외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시각에 오감이 들어간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업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전문가적인 섬세함을 느끼게 하는 말과 함께, 그녀는 “당연 입학하고 싶죠!”라고 덧붙인다.

파티의 정신과 함께 할 사람

지원 자격 자체는 까다롭지 않은 편이다. 한배곳(대학과정, 4년)은 30세 이하, 국내외 고등학교과정에 준하는(대안학교, 홈스쿨링포함) 배움을 마친 이면 누구나 가능하고, 더배곳(대학원과정, 2년)은 나이, 전공에 제한이 없다. 학력이 중요하지 않는 대신, 1차 서류 전형에서는 추천서, 2차 실기전형인 워크숍과 면접에서는 보이는 역량이 중요하다고 한다.




기둥스승(교감) 최준석 씨의 말을 들어본다.

“우리는 창조성을 중시합니다. 파티의 정신과 함께 할 사람을 원하지요. 실제로 지난 학기의 경우 대안학교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오히려 디자인과 무관했던 이들이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어요. 더배곳의 경우, 전공자가 아니라 해도 해당 분야의 작품집으로 대신할 수 있고, 또한 대학 졸업자가 아니더라도 실무 경력이 있으면 지원 가능해요. 1차에서 2배수를 뽑고 최종 워크숍과 면접에서 발표와 표현 등을 관찰하고 합격자를 가립니다.”

학력이나 전공보다는 학교와 함께할 정신, 그리고 창조성이 중요해 보인다.

정식 가을 입학설명회는 11월 10일 낮 2시, 하자센터에서 열린다고 한다. 등록금은 한 학기에 한배곳이 495만원, 더배곳이 550만원 + 입학금 50만원이다.

협동조합, 파티의 꿈

PaTI는 이제 겨우 한 학기를 보냈다. 그리고 현재 대학과정이 16명, 대학원과정이 9명인 작은 학교다. 이들이 꿈꾸는 큰 그림에도 불구하고 지원자들은 궁금하고 불안하기만하다. 졸업생의 활동영역은 어떻게 되는지 한 참석자가 질문했다.

“스페인에 몬드라곤협동조합이라고 있어요. 협동조합으로 시작해 고용을 창출하고 병원, 대학까지 설립해 지역사회를 변화시킨, 스페인의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대표적인 협동조합 성공사례지요. 우리도 그런 협동조합을 꿈꿉니다. 졸업생의 앞날을 ‘보장’은 못하지만, 학교가 돈을 벌게 되면 좋은 선생님 그리고 졸업생을 위해 쓸 겁니다. ‘0에서 0으로’가 파티의 운영 방침입니다. 학교이름으로 어떤 재산도 갖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 우리는 성공할 겁니다.”

지나친 신념의 표현도, 설득의 의도도, 과장도 느껴지지 않는 솔직한 답변을 들으며,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입학설명회 자리를 빠져나왔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홈페이지 : http://www.pati.kr
주소: 경기도 파주시 파주출판도시 회동길 125-15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전화 : 070-8998-5610~4 / 팩스 : 050-8082-0007
이메일: pati.sysop@gmail.com

   취재 : 전경애 싱싱뉴스 시민기자

작성일 : 2013-08-27 조회수 : 6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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