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9일 (월)
신나는 파주
가족과 함께 떠나보는 파주의 산 ②박달산
여름 숲 초록 성찬으로의 초대
어느 날 느닷없이 유월을 맞고, 정신없이 오월을 보낸 것 같습니다. 오월은 어쩐지 내 의지대로 살았다기보다 기념하고 챙겨야 할 날들에 의해 이끌려 살아졌던 것 같기도 합니다. 더구나 유난히 안팎으로 속 시끄럽던 오월을 미처 다 털어내지도 못한 채 준비 없이 유월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렇듯 걱정 근심이 들끓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고 정리할까? 문득 버릴 것이 목까지 차오르고, 가벼워지고 싶을 때 산을 오른다고 노래하던 어느 시인의 글이 떠올라 차창 너머 먼 산을 바라봅니다. 어느 새 앞 다투어 피었던 봄꽃들이 이울고, 여름을 준비하는 숲이 짙은 초록을 물들이며 성큼성큼 산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 달에 한 번은 가족 산행을 하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던 오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 여름을 만나러 박달산을 찾았습니다. 남편의 부재로 이번 산행은 딸 유선이와 둘 만의 동행입니다. 박달산은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와 신산리, 분수리, 영장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369m로 비교적 낮고 평온한 편이지만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어서 결코 작은 산은 아닙니다. 더구나 아직 산과의 사귐이 어색하고 어렵기만 한 나에게는 남편 없이 딸과 단 둘이서만 감행하는 산행이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우리는 가볍게 다녀오기로 한 수 양보하고, 광탄면사무소 뒤편 들머리에서 올라가는 등산 코스 대신 유일레저로 올라가는 짧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리고 점심을 먹은 후, 금촌에서 333번 광탄행 버스를 이용해 유일레저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 3시가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유일레저는 몇 해 전에도 다녀갔던 곳인데 그 사이 눈에 띄게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딸아이는 아무래도‘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쏠리는 모양입니다. 작은 제주도를 연상시키는 탐라국테마파크에서 좀처럼 눈길을 떼지 못하며 발길을 자꾸 멈춰섭니다. 산행 후 다시 들러서 밥도 먹고 놀다가자고 제안을 한 후 물병 하나만 챙겨서 길을 재촉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전에 일찌감치 다녀간 탓인지 일요일인데도 산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이 너무 없으니 조금은 적막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번잡하지 않고 여유로워서 좋았습니다. 길목엔 때죽나무가 이른 여름을 향기로 뒤덮으며 더러는 발밑에 꽃잎 융단을 깔기도 하고, 더러는 종인 듯 등인 듯 하얀 꽃잎을 매달고 길을 밝히며 따라오기도 합니다. 약 30분 동안은 쉽게 올라 갈수 있는 임도로 등산로가 나있어 초자 산행인의 몸 풀기를 도와줍니다. 유하고 착한 길을 따라 국수나무, 찔레꽃, 박달나무, 아카시아나무, 소나무들과 동행하며 걷다가, 낮게 피어 있는 붓꽃, 제비꽃, 엉겅퀴, 괭이밥에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며 걷기도 합니다. 발길에 닿는 흙의 감촉이 그만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몸을 풀었다고 생각될 무렵 갈림길을 만납니다. 왼쪽은 신호약수터로 가는 길이고, 계단을 따라 오르면 주능선을 타는 길입니다. 나무 탁자와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며 갈 길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한 무리의 산행인들은 우리에게 쉼터의 바통을 넘겨주고 계단을 올라갑니다. 유선이와 나도 잠시 그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 곧 그들을 뒤따랐습니다. 드디어 가파른 등산로가 시작됩니다. 내게는 박달산 산행 중 제일 힘든 곳이 바로 주능선 초입의 나무 계단을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시작부터 힘을 빼자 첫 번째 봉우리를 넘는 일조차 쉽지 않습니다. 운동화를 신은 딸도 거뜬히 오르는 길을 등산화까지 챙겨 신은 엄마는 엉거주춤 억지로 기어올라서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딸이 손을 내밀어 나를 끌어올려줍니다. 남들은 식은 죽 먹기처럼 우습게(?) 오른다는 박달산! 그러나 내게는 박달산 조차 결코 녹녹하거나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 높거나 험하지는 않지만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 앞에서 잠시 산 기행을 하자고 약속한 일이 후회스럽기까지 합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우리는 걷다 쉬다를 반복합니다. 해살거리는 여름빛이 나뭇가지 그물망에 걸려 머리 위에서 아른거릴 뿐 숲으로 둘러싸여 여름을 맞는 박달산은 적당히 어둑하고 서늘합니다. 숲이 만들어주는 그늘과“사라락~쏴~”나뭇잎이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가 시원하다 못해 옷에 밴 땀이 식으면서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기까지 합니다. 내가 보기엔 생김이 다 비슷비슷한 나무숲일 뿐인데도 유선이는 쉴 새 없이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운 발견을 합니다. 손가락처럼 생긴 풀, 공룡모양의 돌, 우물 품은 나무, 한 쌍의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는 모양의 나무, 흙의 감촉, 숲의 향기 등. 나도 유선이처럼 온 몸의 감각을 열어두고,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안으로부터 더 짙고 깊게 푸름을 토해내고 있는 산을 받아들여봅니다. 애써 숲을 이해하고 탐험하려 하지 않고 그냥 내 자신이 숲이 되어봅니다. 마음이 씻겨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무겁게 짓누르던 근심도,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분노도 땀과 함께 증발되어 담백해지고 가벼워진 기분입니다. 언제 산행을 후회했던가 싶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4시 30분,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숲길이 열리고 시야가 확 트인 주능선 헬기장에 도착했습니다. 능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제법 멋집니다. 능선에 올라서 보면 박달산 자락은 용미리를 지나 멀리 광탄까지 이어집니다. 점심을 먹었는데도 출출했습니다. 금촌에서 산 찐 옥수수와 물을 딸과 함께 나눠 먹으며 급한 시장 끼를 간단히 끈 후 박달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 시작한 산행이라 정상을 보기가 무섭게 왔던 길을 다시 돌아 하산을 시작해야했습니다. 올라올 때는 그나마 간간히 보이던 사람들마저 내려오는 길에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일찍 어둠이 찾아오는 산은 벌써 밤을 준비하며 스산해지고 있어서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바빠졌습니다. 이럴 때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더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오히려 나보다 딸아이가 더 힘들어했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엄마로서 딸을 보호하고 안심시켜야 한다는 모성 때문인지, 올라올 때와는 사뭇 다르게 내 안에서 저절로 딸아이를 잡아주고, 끌어줄 힘이 생겼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제 겨우 5학년 밖에 안 되었지만 그래도 딸아이가 내 곁에 함께 있어서 의지가 되고 용기가 생겼는지 모릅니다. 중간 중간 나무에 방향 표시를 위해 달아놓은 고마운 빨간 리본 덕분에 내려오는 길을 찾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안전하게 산을 내려온 우리는 유일레저 이곳저곳을 더 둘러본 후 날이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서툰 산행에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하루였습니다. 아마도 이래서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가보다,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현실이 팍팍하고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여름 숲 박달산에서 바람을 이기는 지혜와 초록의 희망을 배워오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 광탄면에 자리한 박달산(360m)은...
박달산이란 이름은 산에 박달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독수리가 많아서 수리봉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그 밖에 발산, 당현봉이라고도 부릅니다. 개명산에서 남북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만장산(萬丈山)과 이웃하여 있으며 파주시청에서 11.5km 떨어져 있습니다. 주능선 중간에는 군부대의 훈련장이 있으며, 파주시에서 2001년에 산림욕장을 조성하여 깔끔하게 정비한 후 서울을 비롯한 근교의 시민들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산기슭에는 있는 마당 바위에서 완원군 9대손 이건섭(李建燮)이 산 아래 연못에 내려가 목욕하는 한편 오지기 벼슬을 마다하고 공부에만 전념하였는데 이곳을 처사바위 처사탕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중국어 학습서인 박통사언해를 숙종때 권대련 변매가 이 산에서 통달하였다 하여 호칭된 것입니다.
박달산 산행은 크게 신산리에 있는 광탄면사무소 뒤편, 광모정(국궁장)을 들머리에서 시작하여 주능선을 따라 정상까지 오르는 코스가 있고, 마장리 유일레저를 들머리로 하여 박달산 산림욕장을 경유, 북능을 타고서 정상에 오른 후, 주능선 정상 삼거리에서 유일레저로 내려서는 코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느 코스를 택하든 가족 산행에는 모두 적합합니다.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고려산 앵무봉(621.8m)이, 동북쪽으로 양주 신불산(470m)이, 북쪽으로는 감악산(673m)이, 동남쪽으로는 도봉산과 북한산이 야트막한 산 너머로 보입니다.

글·사진 최연신 chldustls@naver.com

작성일 : 2008-06-3 조회수 : 1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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